2012 / 10 / 13
*아렌트를 공부했던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내게 <시독>이라는 공부 자리를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원이 끝의 자리에서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아렌트-시독’을 정리하는 이 매듭의 시간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의욕을, 뜻을, 길을 내어주는 생산력을 발휘하길 고대하며 이 글을 쓴다.
특별히 유난스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시독>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내겐 새삼스러웠고 새로웠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모든 것이 배우고 익혀야할 것들 투성이었다. <시독>은 매 순간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미처 배우지 못한 것과 차마 익히지 못한 것과 고스란히 대면(평가)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조금은 외롭게 어울려야 하는 이 공부 자리에서 나는 어떤 의욕을 감지했다.
그 의욕은 ‘말’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문제는 ‘말’에 있었다는 것, 그간 내가 ‘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말’의 문제와 맞서지 못했기에 그리도 ‘글’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말’에 있었던 것. 가령, 한나 아렌트가 기꺼이 서려고 했던 국외자이자 ‘의식적 파리아conscious pariah’의 자리는 내게 ‘비평[사상]가’의 자리처럼 보였으며 모든 관습적 분류와 상투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독자성은 전통적인 기준과 표준에 대한 이의가 제기에 의해, 우리 사고의 기초를 형성하는 고정 불변의 토대를 부정하는 반정초주의적 태도를 통해, 난간 없는 사유(Denken ohne Gelander)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 판단되었다. 아렌트가 걸어온 삶과 사상의 궤적, 이러한 ‘사이-공간’에서 나는 비평가가 탄생하는 순간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자기소외 속에서 분투하는 단독자였을 뿐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 소외를 추적”(『인간의 조건』, 54쪽)하는 이가 아니었다. 내가 말한 ‘비평’엔 ‘말’과 ‘행위’가 빠져 있었다. 비평가는 자신이 쓴 ‘하나의 문장’처럼 외롭게 홀로 서 있을 뿐이며 아무도 그 문장에 손을 대지 못한다(“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 두 사람 모두 고독한 사람이다”, 240쪽). ‘말’과 ‘행위’, 다시 말해 ‘정치’가 빠져 있는 비평은 단지 ‘문장’에 대한 탐닉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아렌트를 통해 내가 보려고 했던 비평(사상)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란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 테다. ‘말할 수 없음’은 ‘나’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나만의 문제라 생각했기에 ‘말’을 밀쳐두고 ‘문장’에 집착했던 것이다. 내몰린 이들, 배제된 이들은 ‘말이 힘을 잃은 세계’라는 조건을 공유한다. 힘을 가지지 못해 가난하고 연약한 것들일수록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성을 경험”(53쪽)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의 조건이란 공동체와 존재의 조건을 되묻는 행위라는 것을 나는 아렌트를 함께 공부하는 <시독>이라는 공부자리에서 배웠다. 차마 익히지 못했기에 나누지 못했다. 아직 <시독>이 낯선 연유는 오직 ‘아직 나누지 못함’에 있을 게다.
제 고백을 앞세워 비상하던 문장들은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말’과 ‘행위’가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지 단박에 제시할 수는 없지만 비상하는 문장이 도달하게 될 귀착 지점이 어디일지는 잘 알겠다. 아울러 그 누구도 믿지 못할 때 결국 모두를 배반하게 되리란 것을 예감하게 된다. ‘말이 힘을 잃은 세계’(공론 영역으로부터 추방된 조건)에서 부여되는 선택지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나’가 무언가를 선택해서 ‘지금-여기’에 도착해 있다고 생각(착각)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시독>이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수 있는 공부-연대-장소일 수도 있다는 예감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부박하고 가난한 세계의 조건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에서 행위의 연약성에 대한 본래의 치료법이 폴리스의 구축이었던 것처럼 <시독>이라는 ‘연약한 막’은 연필처럼 지워지지 쉬운 존재들이 ‘말과 행위의 공유’를 통해 애써 건사하고 있는 ‘어떤 폴리스’라고 하겠다. 이곳에서 “어떤 유용성도 갖지 않으며, 더욱이 유일하기 때문에 교환될 수도 없는, 그래서 화폐와 같은 공통분모로 동등화시킬 수 없는”(226쪽) 말과 행위의 주고받음이 “타서 재가 되는 자연의 과정이 거꾸로 되어, 심지어 먼지조차 타서 불길이 되는 것”(228쪽)과 같은 ‘작품’을, ‘이야기’를, ‘장소’를 애써 가꿀 수 있지 않을까. 아렌트-시독의 공부자리에서 내가 배운 것, 익히지 못해 아직 나누지 못한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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