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는 생활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만화책 읽기 1) ―다카하시 신, <좋은 사람>1, 2(1993 한국어판 1998)

작은 숲 2024. 10. 3. 15:30

2024. 10. 3

지난 일요일 이른 10시부터 최종규 선생님을 이끔이로 삼아 이오덕 어른이 펼친 뜻을 따라 걸어보는 모임을 마친 뒤, 이어서 부산에서 펴낼 어린이잡지 회의를 하니 늦은 5시가 훌쩍 넘었다. 최종규 선생님과 함께 중앙동 곳간 사무실로 넘어와 책 펴내는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는데, 저녁거리를 사러나가는 길에 어제 사지 못한 책이 눈에 밟힌다고 해서 보수동책방골목엘 들렀다. 일본 문고본 여러 권과 보기 드문 잡지 몇 권을 챙겨 돌아나오는 길에 만화책으로 꽤나 유명한 국제서점에 들렀다. 최종규 선생님은 그곳에서도 귀신 같이 숨은 책을 척척 찾아내어 살펴보시길래 책방 구석까지 들어가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만화책 더미를 훑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만화책 꾸러미를 보곤 최종규 선생님께 여쭤보니, 냉큼 들더니 계산을 한 뒤에 내게 선물로 건네주셨다. 다카하시 신이 쓴 <좋은 사람>(1~26권). 한 때 육상 선수였던 이가 러닝화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꿈을 펼치는 이야기 얼개다. 달리기에 대해 몇 번 이야기 했던 걸 떠올리곤 책값을 따지지 않고 선물하신 거다.

어제 한 권, 오늘 한 권(곳간 사무실 책장에 꽂아둔 터라 당장 더 볼 수가 없다)을 읽으며 ‘좋은 사람’이 꾸는 꿈과 펼치는 삶이 참으로 눈부셔서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다가 여러 번 책을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비유가 허무맹랑하다는 뜻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누구나 마음속에 품은 뜻과 꿈을 언제까지나 돌보며 지켜나가자는 북돋음이자 애씀이 배여 있는 말이라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세상엔 <좋은 사람> 주인공인 ‘유지’처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라고 잘라 말할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을 그림과 이야기로 엮었다는 건 어딘가 ‘유지’와 같은 ‘좋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걸 알아보는 눈길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더불어 갖은 이유와 근거를 대야만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라 곧장 꾸는 꿈과 품은 뜻을 펼칠 수 있다는 걸 ‘만화’는 계속 이야기해왔구나라는 걸 알아차린다.

나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용돈을 거의 받질 못했는데, 그런 까닭에 또래와 달리 만화책을 볼 일도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자율학습비나 문제지 살 돈을 조금 꼬불쳐서 벗들과 함께 만화방에도 드나들었지만 별다른  재미를 찾진 못했다. 초등학생 땐 해적판으로 나온 손바닥만한 만화책이 종종 100원에도 팔았기에(학교 앞 문방구 뽑기에서 5등을 잡으면 손바닥 만화책을 주곤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기에 종종 볼 수 있었고, 어쩐 일로 어머니나 아버지가 챙겨오신 이두호 님이 그린 <머털도사>나 다이나믹콩콩코믹스에서 몰래 펴낸 <쿤타맨>과 <용소야>를 집에서 거듭 읽은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앞 ‘엄지 만화방’에서 새로운 판으로 나온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과 <오, 한강>(허영만)을 뒤늦게 읽고 꽤나 감동 받은 적도 있다. <드래곤볼>이나 <슬램 덩크>를 안 본 건 아니지만 또래 동무처럼 푹 빠져 읽은 건 아니다. 대학원 땐 문화연구 붐으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일이 많아 선배 어깨너머로 여러 만화를 펼쳐보긴 했지만 좀처럼 재미를 찾진 못했다.

드문드문 읽는 어린이 그림책과 함께 책장 한 자락을 채운 만화책을 이제야 즐겁게 펼친다. 그 첫 걸음이 <좋은 사람>이여서 기쁘다. 이 만화에선 주인공 ‘유지’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다. 그가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띠기 때문인데, 가만 생각해보니 다른 뜻도 있는 듯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온 유지에게 그곳은 너무나 복잡하고 커다란 곳인 터라 눈이 핑핑 돌아갈만도 하지만 그는 굳이 눈을 커다랗게 뜨지 않는다. 한시도 나고 자란 홋카이도를 잊지 않기 때문인데, 도쿄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어울려 살아온 바를 잇기에 행동에 망설임이 없다. 게다가 오래 품은 꿈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내 곁에도 ‘유지’ 같은 사람이 있다. 내 것을 먼저 챙기기보다 둘레를 먼저 살피고 손수 짓고 꾸린 살림을 애써 나누려는 눈길로 가득한 사람이 있어 그 곁에서 배우고 익히며 나도 작은 꿈을 꾸리며 즐겁게 하루를 짓는다. 


[살림글살이2]

최종규 선생님이 앞표지와 뒷표지가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을 그려놓은 것이라 설명해주시며 이것만으로도 이 판본이 새로 펴낸 애장판보다 낫다 여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