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와 상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메모'에 열중한다. 그만큼 소득이 없는 상념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메모는 언제 글이 되는가? 김영민이나 벤야민은 많은 메모를 남겼지만(남기고 있지만) 우리는 그 메모들을 '글'로 읽고 있다. 나는 무엇을 계획하고, 아니 무엇을 꿈꾸며 메모에 열중하는가? 상념이 많다는 것은 열중하고 있는 메모가 일상을 부지하기 위한 안간힘이거나 일상을 정당화하는 허영일 수 있음을 넌지시 가리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깨어 있고 싶다. 좀 더 '옮아가고' 싶다.
한밤 중에 남긴 메모 한 자락 :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
2012/9/25 덧붙이는 메모
<<인간의 조건>> 5장의 제사를 읽고 남긴 위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고, 추가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슬픔을 말로 옮겨 이야기를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그/녀는 슬픔에 빠진 이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위와 말을 통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시작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거나 연출자일 수 없다”(245쪽)고 한 아렌트의 말처럼 슬픔을 말로 옮겨 이야기화 하는 것은 ‘남겨진 이’의 몫이다. 말과 행위의 결과물인 이야기들은 주체를 드러내지만 이 주체는 저자나 연출자가 아니며 , 이야기를 시작한 누군가는 이야기의 주체일 수는 있으나 이야기의 저자일 수는 없다(245쪽)고 한 것 또한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 문장을 읽고 직감적으로 간취한 ‘아름다움’은 ‘문학적 수사’를 출처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존재함’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 곧 폴리스일 게다.
"폴리스-페리클레스 추도사의 유명한 말을 신뢰한다면-는 모든 바다와 땅을 자신들을 자신들의 모험의 장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무런 증언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보장해주며, 따라서 그들을 칭찬할 줄 아는 호머나 그밖의 사람들이 필요없음을 보증해준다. 행위하는 자들은 타인(시인)의 도움없이도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의 영원한 기념비를 세울 수 있으며 현재나 미래에 찬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폴리스의 형식에서 함께 하는 인간의 삶(공동존재)은 가장 무상한 인간활동인 행위와 말 그리고 가장 덧없는 인위적 '생산물'인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준다." (259~2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