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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44

덧없음과 걷돌 수 있는 힘 사이를 오가며⏤오솔길 이야기(4) 2023. 10. 19(10. 30) 상처 입은 초식동물처럼 몇년을 웅크리고 지내던 나날 속에서 오솔길을 만났다. 찾아냈다기보다는 우연히 주운 낱말이라 여겨왔다. 홀로 뭔가를 꾸려보려 애쓰는 동안 만난 낱말이라 애틋한 마음으로 매만지며 간직해왔다. 사람들을 피해 동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만나게 된 길이 모짝 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는데, 돌아나오지 않고 기어이 길 아닌 곳을 향해 더 걸어들어갔기에 걷고 있는 이 길을 ‘오솔길’이라 여길 수 있게 된 듯하다. 그래서인지 오솔길이라는 낱말을 떠올릴 때면 스산하고 외롭지만 고즈넉한 향이 은은하게 나오는 것 같아 쓸쓸함과도 그럭저럭 어깨동무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만났던 이들, 특히 모임을 열면 드문드문 찾아오던 이들은 대체.. 2023. 10. 31.
사소한 결별_2018년 여름 2018. 9. 25 내가 알던 한 사람의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욕을 해주고 싶었다 그에게 매일 들여다보고 있던 식물의 줄기가 꺾였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싶었다 몇년만에 만난 사람은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멀리서 보자마자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꿈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커다란 수박을 쪼개어 플라스틱통에 나누어 담았다 안녕 내년에 다시 만나자 올해 마지막 수박에게 인사를 하며 조각낸 수박을 고기처럼 먹었다 조각난 조각들이 다른 곳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해 간절함 없이 기도했지만 절벽 같은 슬픔으로 벼락 같은 말로 돌아오리란 것도 예감할 수 있었다 평범한 것을 유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소하게 떨어져나온 조.. 2023. 9. 26.
길 잃기와 살림 잇기 2023. 5. 15 사람들을 피해 송도 해변가 주변을 바장이며 종일 걷(고 헤매)다가 돌아와, 밥을 지어먹은 후에 짧은 글을 쓰곤 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던 걸음 뒤에 남은 찌끼 같은 글이었다. 무언가를 쓰기 위한 하루가 아닌 쓰지 않기 위한 하루라 여기며 지냈던 나날이었다. 그곳이 어디일지 뚜렷하게 알지 못했지만 ‘여기가 아닌’ 바깥으로 나가보려 무던히도 애썼던 쓸모 없는 걸음이 쌓여 갔다. 낯선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보면 막다른 골목이어서 한참을 돌아나와야 했고 산책로를 걷다가도 어느새 길은 온데없데 없이 사라져 나는 숨가쁘게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길을 잃었을 땐 덩그러니 버려진 채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초연한 느낌과 서식지에서 벗어난 들짐승처럼 다급한 호흡이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2023. 8. 6.
긁어내고, 벗겨내고, 지우는 글쓰기 ‘하얀 바탕’이 지운 것들 글쓰기는 없던 무언가를 새롭게 더하는 일이 아니라 있던 것을 발견하거나 무언가를 빼고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생활 속에 소리 없이 쌓인 더께를 벗겨내는 것만으로도 ‘몰랐던 얼굴’을 만나게 되는 청소처럼 말이다. 하얀 바탕 화면 위에 검은색 글자를 ‘채워’나가는 작업을 글쓰기라 불러왔지만 외려 ‘하얀 바탕’을 ‘긁어’내고 ‘벗겨’내는 일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하얀 바탕’은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백지’라기보단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원치 않는 역할을 떠맡거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동안 쌓인 더께에 가깝다. 윗사람 앞에 설 때, 학교에 갈 때, 친구를 만날 때, 오늘도 누군가가 되어야 할 때마다 우리는ᅠ자신을 지우고 ‘하얀 바탕’이 된.. 2023. 7. 22.
생활파(派)의 모험 2020. 8. 14 습관과 버릇에 대한 생활글을 써보자는 제안은 각자의 생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생활 속에서 홀로 ‘탐구/탐험’(조형) 하고 있는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토로조차 타임라인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 그저 하나의 게시물로 업로드 되고 업데이트되는 형편이지만, 만약 당신이 ‘생활파(派)’라면 끝없이 업로드되는 먹거리들의 아귀다툼 바깥에서 애써 조형하고 있는 원칙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가령, 오늘 (남들처럼) 먹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도 끝내 먹지 않은 것들의 목록 같은 것 또한 있겠지요.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은 것들, 업로드할 수 없고 업데이트가 불가능.. 2023. 1. 18.
불쑥 건너는 밭은 잠에서 깨면 몸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무언가를 잡기보단 오늘도 무심하게 환한 이 세상이 무사한지 더듬어볼 뿐이다. 극적인 것이나 드라마틱한 기대 없이. 벽에 귀를 가져다대면 벽 너머의 희미한 소리가 금지된 무언가가 번지듯 천천히 선명해지는 것처럼, 멀리서 오고 있는 열차의 기척을 희미하게 느끼기라도 하듯 지난밤과 잠과 꿈과 몸의 기척을 더듬어본다. 서로가 너무 가깝거나 아득해서 온통 뿌옇고 희미할 뿐이다. 물 한 잔이 필요하다. 작은 파도가 일렁일 때 잠시 나타나는 물보라처럼 차갑지 않은 물 한 잔이면 몸에도 작은 물보라가인다. 소꼽놀이용 청진기를 가져다대보는 꼴이겠지만 미동 없는 몸을 무심하게 살피며 전자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것처럼 변함없이 무사.. 2022. 3. 20.
오늘도 우리는 테이블 위에서 우물을 길어올릴 테니까 ‘아침에는 책상이 되고 점심엔 식탁이 되며 저녁엔 테이블이 되는 곳은?’ 이건 사물이 아니라 장소에 관한 수수께끼다. 사람들의 손길이 어울려 그곳에 숨결을 불어넣을 때 장소가 조형된다. 서로의 손길이 만나는 곳, 나누고, 만들고, 더하고, 덜기도 하는 곳은 언제나 테이블 위에서다. ‘책상’은 어쩐지 주인이 있을 것만 같고 ‘식탁’은 음식이 없다면 조금 쓸쓸해진다. 하지만 ‘테이블’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두기만 해도 충분하다. 모든 장소엔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서, 그 곁에서 사람들이 만나 어울린다. 엔 세 개의 테이블이 있다. 하나의 테이블은 당연히 책을 위한 자리로 사용 되고 다른 하나는 책방 방문객들이 앉아서 책을 보는 곳으로, 나머지 하나는 주로 주인장의 몫으로 사용 되는 듯하다. 생활글쓰기 모.. 2020. 7. 21.
생활문학 탐구 와 함께 하는 생활글쓰기 시즌 2 ‘생활문학’ 탐구 1강 ‘생활문학’이란 무엇인가요?2강 생활, 의(義) : 생활 속에서 지켜가는 정의로운 원칙3강 생활, 식(識) : 생활 속에서 익어가는 것들_습관과 버릇 4강 생활, 주(洲) : 함께 있지만 모르는 것들_집, 방, 몸5강 생활선언문 쓰기6강 어제 나부끼던 깃발 : 생활문학 탐구 후기 *신청은 마감되었습니다 2020. 7. 12.
살림살이의 글쓰기 냉장고에선 음식이 썩어간다. 다행이다. 음식 쓰레기를 모아둔 통을 이틀만 잊어도 그곳에 구더기가 꼬인다. 다행이다. 아무리 표백하려고 해도, 감추려 해도 기어코 드러나는 것이 생활의 이치다. 생활 속에 썩어가는 것이 보인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표식에 가깝다. 아직 썩지 않았을 뿐인데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두면 모든 것이 싱싱하게 유지된다고 쉽게 믿어버린다. 그 손쉬운 믿음을 심문하는 것이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음식이다. 신경 쓰지 않으면, 돌보지 않으면 분명히 썩는다는 것을 ‘냉장고’ 안에서라도 배울 수 있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음식물 쓰레기에 꼬인 구더기는 무너진 생활의 증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활이 보내는 긴급한 신호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을 때 그곳은 진창이 된다. .. 2019. 7. 2.
전작 읽기_권여선(1) 전작 읽기_권여선(1) 에서 전작 읽기를 시작합니다. 한 작가가 써내려 간 작품을 빠짐없이 따라 읽으며 한 사람이 가닿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희망)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보살펴온 희망과 염원의 걸음 곁에 각자의 발자국을 남겨봅시다. 누군가의 초대로만 열리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나직하게, 긴 호흡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첫 번째 작가로 권여선의 장편 소설 두 권과 소실집 두 권을 읽습니다. 삶이 있는 곳에 상처가 있으며 곳곳에 편재한 폭력에 바스러져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 그러나 부서짐 속에서 기어코 빛을 내는 존재의 힘을 마주하게 하는 소설을 함께 읽으며 가혹한 세상을 넘어가는 방식을, 살아내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 2019.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