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곳간

어느새 오솔길에 들어선 모두―113번째 <문학의 곳간> 뒷이야기글

작은 숲 2025. 5. 13. 16:10


비, 상현, 아름, 승리, 지원 그리고 대성. 이렇게 여섯이서 113번째 <문학의 곳간>을 열었다. 비는 이 모임을 시작했던 2013년 7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다. <문학의 곳간>에 비가 없으면 뭔가 이상하다. 상현은 2021년 이맘때부터 모임을 함께 열고 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오가던 이 같다. ‘숨 쉴 틈’을 찾아 <문학의 곳간>에 온다는 아름은 2018년 <전작 읽기>(권여선) 모임에 첫 걸음을 했고 이어서 <문학의 곳간>으로 미끄럼을 타듯 즐겁게 넘어왔다. 승리는 2023년 화명동 ‘무사이’에서 열었던 글쓰기 모임에 이어 매달 빠짐없이 <문학의 곳간>을 함께 열고 있다. 지원은 진주에서 열었던 글쓰기 모임, 그 모임을 바탕으로 함께 펴낸 『살림문학』과 이어져 작년 12월에 첫(큰!) 걸음을 한 후, 이달에도 합천에서 차를 타고 먼 걸음을 해주었다.

‘우린’ 꽤나 오래 만난 셈인데도 모임을 열 때마다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 새롭게 알게 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숨죽이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2시간, 3시간이 지나 있다. 누군가가 꺼내놓는 이야기를 2~3시간 동안 듣는 일은 생각만큼 쉽진 않다. 더군다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이야기라면 그걸 따라가는 것조차 힘겨울 때가 잦다. 그렇다고 자리를 뜨기보단 ‘딴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슬쩍 비치(엿보)는 그런 딴짓이 <문학의 곳간>을 너그럽게 감싸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번에 이야기 자리를 펴면서 곁에 둔 책은 비비언 고닉이 쓴 『상황과 이야기』(이영아 옮김, 마농지, 2023) 인데, 그이가 쓴 제목이 근사한 또 다른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서재인 옮김, 바다출판사, 2022)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그 거리가 꽤 자주 나를 위한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반짝이는 경험의 빛을 탄생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뉴욕 거리에서 자랐고, 뉴욕 거리에서 글을 썼던 비비언 고닉에서 (뉴욕) 거리가 무대였던 것처럼 모두에겐 저마다의 무대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서로가 쟁여둔 살림 이야기를 꺼내는 이 작은 테이블 위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모인 이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어떨 땐 모임을 하면서 ‘이번엔 뒷이야기(후기)를 쓸 수 없겠다’고 앞질러 판단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쓰려고 뒤적거리다 나가떨어지곤 한다. 무얼 쓰려고 했기에, 아니 무얼 쓰고 싶었기에, 무엇도 쓰지 못했나.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곳은 작은 무대가 된다. 그 무대 위에서 저마다가 품어온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나는 언젠가부터 콧노래를 듣거나 춤을 닮은 몸짓을 봐왔다. 저 가락을 적어둬야지, 저 춤을 옮겨야겠어라고 마음먹기 때문에 매번 뒤적거리다가 포기하고 만다. 몇 년 동안은 쓸 수 없는 걸 쓰려고 했구나라고 돌아보았지만 다시 몇 년 동안은 저 이야기는 다르게 적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적거리는 일은 그저 못 적은 시간이 아니라 다르게 적어보려고 애쓴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사진 한 장도 찍을 새가 없었던 모임이지만 기억나지 않는 가락에 실린 콧노래와 아주 잠깐 무척 근사했던 몸짓이 그린 궤적과 함께 잔기침을 닮은 딴짓이 함께 열었던 자리가 매달 열린다는 걸.

자전 이야기 쓰기를 다룬 『상황과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책은 쓰기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읽기에 대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1970년대 자전 에세이와 사회 비평이 결합된 개인 저널리즘이라 불리던 장르의 글을 쓰는 작가로 ‘나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비비언 고닉은 그런 글이 고백, 심리치료로서의 글쓰기나 노골적인 자기도취의 구렁텅이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서술자가 자신에 대해 쓰는 방식이 곧 에세이의 주제가 되어 메아리처럼 서로를 모방”하는 자전 에세이에 흐르는 콧노래와 몸짓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만든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건 걷는 이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오솔길을 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오솔길에 들어갈 수 있는 지도는 없다. 글쓴이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글쓴이와 읽는이의 걸음이 겹치면서 갈리지는 자리에 또 다른 오솔길이 생긴다. 『상황과 이야기』엔 자전 이야기라는 저마다가 내어놓은 오솔길과 그 걸음을 뒤따라 걷는 또 다른 걸음이 남긴 오솔길이 한 가득이다.

어떻게 아무도 없는 길을, 어쩌면 아무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오솔길을 이토록 오래 걸을 수 있나. 비비언 고닉은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나 혼자서는, 일상의 나로서는 할 수 없었을 이야기를 하는 이 타자와의 만남을 날마다 고대했다.”고도 말한다. 서술자와 타자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나, 나에 대해 쓰는 나를 가리킨다. 이 책을 읽은 모두는 아마도 다음 문장에 밑줄을 그어두었을 것이다. “내가 감응한 것은 고백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그들의 페르소나였다.” 페르소나를 찾는 일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일, 기꺼이 고독을 자처해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오래 걸으며 오솔길을 내어놓았던 것이겠지.

113번째 <문학의 곳간> 사귐 시간은 이 페르소나를 불러보는 자리이지 않았나 싶다. 어색하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가 보이지 않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몸을 기울인다. 가락을 알 수 없는 콧노래와 조금은 이상한 몸짓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낯선 오솔길에 들어선 자신을 보게 된다. 이야기를 하는 이도 이야기를 듣는 이도 모두, 오솔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