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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6

회복하는 글쓰기 : 다시 시작하는 생활의 장르 아무리 힘을 내어봐도 ‘어쩔 수 없는’ 세계에서 정처없이 흔들리고 흐트러지면서도 끝까지, 똑바로 걸어나가고자 했던 일본 전후(戰後) 여성들의 삶을 ‘고유한 세계’로 구축해나간 감독, 나루세 미키오. 결혼을 네 번이나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 여성이 보살폈던 가족의 모습을 담은 1952년작 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3녀 1남의 남매 모두 아버지가 달랐던 이유는 혼자 힘만으론 자식들을 키워낼 수 없었던 전후의 궁핍한 환경 때문이었다. 막내 딸 기요코(다카미네 히데코)는 무능력한 오빠와 허영에 찬 언니들, 아둔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자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독립한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미츠코(둘째 언니)의 소식을 묻기 위해 기요코의.. 2018. 10. 7.
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 ‘유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미선’의 집에 얹혀 살며 가게 일을 돕고 있지만 본업은 따로 있다. 전설적인 소매치기 ‘강복천’이 유나의 아버지였고 이름값에 걸맞게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기에 유년 시절부터 홀로 커야 했던 유나 또한 살아가기 위해선 소매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김운경 극본, JTBC, 2014)는 매회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놀라웠던 것은 등장인물들이 물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이었다. 돈 많은 유부남과의 전략적 교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온 미선이 제 손으로 하는 거라곤 패션 잡지를 보는 것이나 휴대폰으로 고스톱 게임을 하는 것 정도인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 한 잔을 달라고 유나에게 부탁 한다. 미선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유나에게 컵을 .. 2017. 11. 1.
불이 켜져도, 불이 꺼져도―<흐트러지다 乱れる>(1964) 2017. 10. 10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의 (1964)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두 장면. 영화 초반, 카메라는 전쟁으로 불 타버린 집터에 기둥을 세우고 17년 동안 남편도 없이(결혼하고 반년만에 필리핀에서 전쟁으로 사망) 시집살이를 해오며 가게(동시에 가계)를 꾸려온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불꺼진 부엌을 비춘다. 바깥에서 새어들어온 불빛으로 대충의 윤곽을 드러내는 설정이지만 나루세는 그런 정황은 살리되 마치 17세기 회화처럼 음영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주방의 면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담아낸다. 부엌에 불이켜지자 정갈하고 빈틈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건 영화 내내 카메라가 비추던 가게 내부에 도열해 있는 술병들과 식료품만큼 체계적이진 않지만 17년(다시.. 2017. 10. 11.
허리숙여 절하는 이유 2017. 6.20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의 1952년작 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은화일지도 몰라 바닥에 떨어진 병뚜껑을 줍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딸로부터 왜 나를 낳았냐고, 왜 여러 남자와 결혼을 했냐고 따지는 말에 너희들을 키우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었었다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너마저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냐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한 뒤, 어머니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찐빵을 챙겨가도 되겠냐고 딸에게 되묻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혹여나 은화일까 싶어 어머니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집어올린다. 기대와 달리 은화가 아니라 병뚜껑이다. 손바닥에 쥐어진 것이 쓸모없는 병두껑일지라도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 2017. 9. 9.
연인이라는 어리석음으로 잠깐 켜는 희미한 등불-<부운浮雲 Floating Clouds>(1955)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가난한 연인들, 어리석은 연인들. 연인이라는 어리석음. 한 때 달고 맛있게 먹었던 열대과일과 같은 시간. 도피 여행 중 그들처럼 동남아 시절을 보낸 여관 주인의 물음. "두리안 먹어봤지요?" 카메라는 1초정도 유키코의 흔들리는 표정을 담는다.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그 표정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열대과일이 없는 세계에서 열대과일을 찾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세계에서, 한사코 다른 이를 쫓는 남자(도미오카)와 불가능한 사랑을 쫓는 여자(유키코)는 가끔 함께 길을 걷는다. 눈앞의 모퉁이만 지나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없는 길을,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이 두 사람은 서로에 기대어 쓸쓸하고 소중하게 걷는다. 아주.. 2014. 9. 28.
물을 뿌리는 사람, 씨앗을 뿌리는 사람 * 나루세 미키오 영화 속의 물을 뿌리는 여자들 (1952) (1954) (1967)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예정대로 6회 지방 선거가 진행되었고 예상처럼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 정확하게 말해 바다에 빠진 수백 명의 아이들 중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체념과 덧없음을 외투처럼 입고 그 이물감을 견디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진짜 절망은 바로 그 체념과 덧없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모두를 무력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저 체념과 덧없음이라는 구조와 싸워야 한다. 싸워 버텨내야 한다. 얼마 전 에서 기획전으로 열린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1905∼1969)의 영화들을 보면서 섬세하고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는 도저한 비애와 삶의 무상함을 탐닉.. 2014.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