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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51

기지개를 켜듯 접힌 시간을 펼쳐 2023년 하반기 주제를 ‘가난이라는 주름’으로 묶어보았던 것은 알게 모르게 접어둔 것들을 펼쳐보면 좋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펼쳐봐야겠다 싶어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처럼 기억을 접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저마다가 놓인 형편 탓에, 또 갖은 이유로 접어두어야만 했던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스스로도 잊고 있던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자리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자리를 솔직한 고백만이 아니라 탐구와 탐색도 함께 하면 좋지 않을까 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멈칫하게 하고, 뒷걸음질치게 하죠. 거기에 접힌 기억과 시간이 주름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빈곤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가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인 것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2024. 2. 24.
뒤쫓다-뒤따라가다-뒤에 서다-돌보다 ‘뒤쫓다’는 낱말을 앞에 놓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해요.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엔 ‘뒤-쫓다’를 “뒤를 따라 쫓다”와 “마구 쫓다”라고만 풀이되어 있습니다. 풀이말엔 나오지 않지만 ‘뒤쫓다’는 무언가를 바로 잡기 위해, (도망가는 무언가) 뒷덜미를 잡기 위해,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으려는 태도가 배어 있는 듯합니다. ‘바로 잡기’는 ‘손아귀로 움켜쥐는 일’과 이어져 있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낱말을 풀어볼 수 있지 싶어요. 뒤쫓는 건 바로 잡기 위해서라기보단 혹여나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놓쳐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 뒤를 쫓아 가는 것이겠지요.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깁니다. 그.. 2024. 1. 24.
오늘 꼭 건네야 하는 이야기 어떻게 이 많은 가족이 변화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감지하고 가늠하며 이야기로 펼쳐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사는 곳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취급이 구성원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스미는지, 마치 온도계처럼 ‘세상의 기온’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세라 스마시의 를 읽어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곧장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나 냉랭한 것일까. 어째서 여기-지금-우리 이야기를 펼쳐내지 않고 있는걸까. 무엇이 이야기하는 걸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는 “날아서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는 땅”으로 취급된 지역에서 대물림되는 가난의 악순환을 끊어내야겠다는 의지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곳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팽팽.. 2023. 11. 7.
더 많은 가난⏤바깥으로 나아가며 이어가기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은 한국이 IMF를 한참 지나는 길목에서 공개된 소설입니다. 그 당시 흔하게 접해온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나 그와 무관하게 마침내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뚜렷하게 파악하기 힘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밤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매일 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립니다. 가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가난은 생생함보다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건 배수아가 가난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증언하거나, 해결의 필요성이나 .. 2023. 10. 18.
가난이라는 주름 가난이라는 주름 각자 입안에 감춰둔 충치[보석] 같은 그림자가 아닌, 모두가 가진 밑그림 얼룩[반짝임]처럼 금새 눈에 띄는 모든 색깔을 단박에 집어삼키는 검은[흰] 색깔 가까이 있지만 한쪽으로 밀쳐둔 서둘러 지워버리고 치워버린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시간 2023년 하반기 에선 ‘가난’에 관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장애물이나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겨왔을 뿐 좀처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던 ‘가난’의 안팎을 다섯 권의 책을 타고 넘나들어보려고 합니다. 이 탐험 안에서 ‘한쪽으로 밀어내어도 어느새 곁에 있는 것들’과 마주해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가 열리길 기대합니다. 9월 23일_(97회) 배수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 10월 28일_(98회) 세라 스마시, 『하틀랜드』(홍한별 옮김.. 2023. 8. 31.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 2023. 7. 19 지난달부터 생각나는대로 하루 계획표를 짜보고 있다. 열 가지 정도 적어두어도 서너 개도 지우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흥미가 점점 떨어지지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면 근처에서 뭔가를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매일 시 한 편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조은 시인이 펴낸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하반기 프로그램 주제를 '가난'으로 잡아두었는데, 조은 시인이야말로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가난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을 애써 위무하거나 과시하지도 않는다. 주변엔 온통 가난한 것 투성이어도 흐릿하거나 막연한 것 하나 없이 맑고 뚜렷하다. 예전에 읽었던 산문집과 시집엔 당당함이 묻어 났는데, 이번 시.. 2023. 7. 19.
깜빡임을 쫓아_96회 <문학의 곳간> 사귐 시간 주제 캐슬린 스튜어트의 (신해경 옮김, 밤의책, 2022)은 재빨리 그린 ‘캐리커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도 꼼꼼하게 기록한 ‘관찰 일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론 낚아채듯이, 때론 지겨울 정도로 촘촘하게 우리 주변을 흘러다니는 알 수 없는 힘을, 째깍째깍 무심하게 흐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을(아직 터지지 않았지만 터지지 않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터질 것만 같은!), ‘평범하게 들썩이는’ 온갖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떨 땐 보이고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 어느 날엔 들렸는데 어느 날엔 들리지 않는 것, 어떤 날은 읽을 수 있지만 어떤 날엔 읽히지 않는 것이 늘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오늘 읽히지 않는다는 게 앞.. 2023. 7. 11.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길을 가다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건 아닐 겁니다.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올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주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바닥에 버려진 것은 누군가의 줍는 몸짓으로 잠시 특별한 것이 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진 일상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일,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줍는 일은 살림을 매만지고 다독이는 손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허리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올릴 때 무언가가 반짝하고 나타납니다. 그 반짝임을 문학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2013년 여름부터 시작한 이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2023년 상반기의 문을 엽니다. 아무것도 아닌.. 2023. 2. 3.
그 사람의 말(투)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2023. 1. 9.
버려진 자리, 남겨진 자리 2022. 12. 30 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어느 러시아 기자는 고레에다 영화를 일러 “남겨진 사람을 그린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고레에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의 알짬이었다. 영화 데뷔작 (1995) 또한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빛을 쫓아 갑작스레 곁을 떠나버린 이(이쿠오)로 인해 어둠 속에 남겨져야 했던 이(유미코). 이 시종일관 칙칙하고 어두운 톤을 유지하는 건 이 영화가 상복을 벗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말한다. 유미코가 줄곧 이쿠오의 죽음에 붙들려 있는 건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은 다르다. 이라는 제목은 무언가를 좇아 갑작스레 여기를 떠난 이쿠오(들)의 알 수 없는 열망(이끌림)을 가리키.. 2023.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