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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옮겨적기

숙련되지 않는 것들, 계속해야 하는 것들

by 작은 숲 2015. 1. 19.

2015. 1. 19



"40세에 첫 소설을 쓰고 나서 다시 40년 가까이를 더 살았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직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길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런 정신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각자 사람에 다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글 쓴 지 40년이 다 되지만 어떻게 된 게 이 노릇에는 숙련이라는 것이 없다. 숙련은 커녕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 이 노릇이다."

―박완서, 「이야기의 힘」, 『세상에 예쁜 것』, 마음산책, 2012. 29쪽




빨래를 널면서 김두수를 들었다. 베란다 문을 열어두고 마루에 앉아 커피를 내리고 사과 한 알을 야무지게 깎아 남김없이 먹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손에 잡힌 책을 펼쳤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유고 산문집이었다. 밤새 떨었는지 몸이 조금 무거웠지만 선생의 문장을 읽고 싶은 마음에 냉큼 일어나 손이 빨개지도록 빨래를 털어 널었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추세워 몇편의 산문을 천천히 읽으니 선생의 꾸밈없는 정갈한 문장이 이곳에 내려앉은 듯하여 세간이 말갛게 보였다. 평생 썼던 작가이고 누구보다 많은 글을 썼던 작가지만 아마도 매일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 작가. 아이를 키우고 세간을 돌보며 썼을 듯한 선생의 문장을 읽으며 평생 썼기에 끝까지 젊을 수 있었던 그 일상을 겨우 어림짐작해본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 곁에 오직 계속 써야만 그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동료와 함께 하듯, 세간을 매만지듯 부단히 읽고 쓰는 삶. 생활에 기교가 깃들 자리가 없듯이 꾸밈이나 장식없이 사람살이의 도리와 이치를 배우고 짚으며 조금 더 읽고 쓰는 일상. 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친구의 선잠을 염려하며 하나의 바람을 그저 적바림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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