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29 상복을 입고 묻는 안부―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김애란이 쓴 단편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엔 다급한 요청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선배로부터 온 요청이고 그 다음은 어린 시절, 물에 빠졌는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 스스로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순간입니다. 이 두 요청엔 다행히 응답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청엔 ‘나’가 응답을 했고 두 번째 요청엔 ‘병만’이라는 또래 친구가 응답해주었습니다. 그 응답의 흔적이 팔뚝에 남아 있어요. 손이 아니라 팔뚝이라는 점에 주목해봅시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팔뚝을 잡았을까요. 그건 잡은 것이라기보단 붙든 것에 가까울 겁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누군가의 팔뚝을 붙듭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헌데 손이 아니라 팔뚝을 붙들었다는 건 ‘어긋남’.. 2024. 11. 26. 꼬리라고만 말할 수 있다면 2024. 10. 5 자고 일어났더니 꼬리가 생겼다! 아이 몸은 날마다 달라진다. 달라지는 몸을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건 아이다. 아직 뼈가 여려 잘 다치기도 하지만 잘 자란다고도 할 수 있고, 잘 바뀐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그림책은 달라진 몸을 알아차리는 일이 어린이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보는 일과 이어진다는 눈길을 담았다. 나를 가장 알 안다고 여긴 엄마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동무 눈엔 보인다. 어른들 눈엔 보이지 않는 게 어린이들은 알아본다. 이건 그저 이야기 설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작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 서고, 편견없이 바라보기 때문에 아이들 눈엔 보인다는 뜻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어린이 몸이 달라지는 걸 곧장 ‘2차 성장’이라고만 봐선 안 되지 싶다. 스스로 몸을 살피는 일은.. 2024. 10. 5. 살림짓는 작은 아이 2024. 8. 31책장 한쪽에 그림책을 쌓아두었다. 느긋할 때 읽어야지 마음먹었지만 먼지가 쌓일 지경이어서 매일 아침 눈길만 주고 선뜻 펼치지 못했다. 어제는 어머니 생일이라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었다. 즐거웠고 감사했고 뿌듯했다. 푹 자고 일어나 녹차를 마시며 ≪티치≫(팻 허친스 그림/글, 박현철 옮김, 시공주니어, 1997)를 펼쳐보았다. 이 그림책은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어둔 장면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엔 크기와 색깔이 다른 옷이 눈에 띄었다. 다시 보니 얕은 언덕에 나무를 세우고 줄을 이어 빨랫줄을 만들었는데, 푸른 하늘 같은 배경을 그리지 않아서 파랗고 노랗고 빨간 옷가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세워둔 나무 아래엔 풀이 더 길게 자라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다... 2024. 8. 31. 작은 글씨로 그린 마음 무늬 2024. 6. 11스무살 무렵에 시도 잘 읽어내고 싶어서 애를 써서 자주 시집을 펼쳤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읽고 또 읽기를 되풀이했는데, 대체로 이야기꼴을 갖추고 비유가 현란하지 않은 장정일이 쓴 시집 두 권이 좋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 군대에 잡혀가기 전에 다행히 시집을 여러 권 읽은 바 있어서 읽을 거리로 자리 잡혀 있었고, 뭔가를 읽을 짬이 없는 군대에선 짱박혀서 읽기엔 시집만한 게 없었다.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GOP에 들어가 철책선을 지키는 일을 했는데, 나는 야간 근무를 서면서 졸거나 잔 적이 거의 없었다. 고참이 잠들면 건빵 주머니에 넣어둔 시집을 꺼내 읽거나 두 번 접어서 여덟 면으로 나뉜 편지지에 밑도 끝도 없는 편지를 썼다. 오늘 이오덕 어른이 펴낸 마지막 시집에.. 2024. 6. 11.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 2023. 7. 19 지난달부터 생각나는대로 하루 계획표를 짜보고 있다. 열 가지 정도 적어두어도 서너 개도 지우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흥미가 점점 떨어지지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면 근처에서 뭔가를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매일 시 한 편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조은 시인이 펴낸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하반기 프로그램 주제를 '가난'으로 잡아두었는데, 조은 시인이야말로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가난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을 애써 위무하거나 과시하지도 않는다. 주변엔 온통 가난한 것 투성이어도 흐릿하거나 막연한 것 하나 없이 맑고 뚜렷하다. 예전에 읽었던 산문집과 시집엔 당당함이 묻어 났는데, 이번 시.. 2023. 7. 19. 흐트러짐 없이 사위어가는 것 2023. 1. 21 오소영 작가의 개인전 (2023. 1. 20~30)을 보기 위해 '18-1 gallery'에 들렀다. 1,2층을 여러번 오르내리며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선 채로 서성였다.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적막하고 쓸쓸했지만 사위어간다는 것이 꼭 사라지는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 서서 사위어가는 것을 지켜보(내)는 동안 사그라지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타오르는 것, 타들어가는 것, 꺼져가는 것이 하나의 몸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몸은 흐트러짐이 없다.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어야 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오래도록 들판을 보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저 들판과의 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지켜(보)낸 시간의 기록이.. 2023. 1. 24. 끄트머리 눈곱처럼 작은 글씨 2022. 12. 7 ‘농촌 어린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이오덕 선생이 1958년부터(1952년 것도 한 편 들어가 있다) 1977년까지 20년 동안 주로 농촌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그때그때 모아두었던 것을 엮은 책이다. 지난날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품은 시집이라는 드문 책이지만 으레 작고 연약한 것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티나지 않게!) 은근히 업신여기며 한쪽으로 미뤄두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오덕 선생의 발자취를 뒤쫓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침판 머리말」을 읽자마자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단박에 여러 꼭지를 읽지 못하고 한두 꼭지정도만 겨우 읽고 오래도록 뒤척인 탓에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야 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맑.. 2022. 12. 7. [출간 일지] 아이처럼, 바람처럼, 메아리처럼 [출간 일지] 2019. 4. 21_아이처럼, 바람처럼, 메아리처럼 진주에서 진행한 글쓰기 강좌 2회차. 늘 그렇듯 이미 형성되어 있는 커뮤니티에서 진행하는 강의는 예정된 시간을 넘기고도 끝날 줄을 모른다. 3회차 강좌여서 강의 형식이 적합하지만 할 수 있는만큼 글을 써보기로 한 터. 구성원들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 받노라면 의도없이 도착하는 크고 작은 깨침의 순간으로 웬만한 피로는 어느새 온데간데 없어진다. 정제되지 않은 글을 읽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런 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조언 하는 일은 쉽다. 어떤 글이든 그 사람의 이력이 그림자처럼 드러나 있기 마련이어서 곳곳에 작은 의욕의 기미가 쟁여져 있다. 그곳에 밑줄을 치는 일이면 충분하다. 쓰면서 알게된다고 했지만 쓰고도 알지 못했던 것을 마침.. 2019. 4. 24. 출간 일지 _메모 2019. 4. 20 2019. 4. 20. 1. 어제 한 동료가 책 출간을 축하한다며 한 권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2. 첫 번째 평론집을 읽고 있던 사촌을 떠올리며 연락했다. 군대에 있을 때 꽤 여러 통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촌의 이름을 오랫만에 적고 서명을 했다. 3. 대학 시절 록밴드 활동을 함께 했던 후배가 책 인증샷을 보내주었다. 4.과 친구들이 5월엔 책잔치를 하자고 제안해주었다. 5. 진주 '소소책방' 글쓰기 강의를 마친 후 참석자 전원이 책을 구매해주셨다. 6. 동료 평론가가 책 출간을 축하한다며 멋진 명함 케이스를 선물해주었다. 쓸 일이 많이 생길 거라는 덕담과 함께. '회복'이라는 게 뭘 뜻하는 것이냐고 묻길래 두서 없이(그러나 짐짓 두서 있는 것처럼) 이야기 했다. 을 소개하고 안내하면서 '회복하는 생활'.. 2019. 4. 22. 좌절됨으로써 옮겨가는 이야기 잠수와 읽기 어떤 ‘읽기’의 순간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잠수를 닮아 있다. 읽기란 우선 고요해지는 일이다. 숨 참기, 아래로 내려가 경계와 대면하는 것, 고요. 고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고요 속에서만 겨우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상태에서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그걸 알기에 오늘도 고요해질 수 있어야 한다. 고요해지지 못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문장이 있었다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 자책한다. 오늘 내가 놓쳐버린 문장들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고 잠수 한다. 고요 속으로 내려가 잠깐, 겨우 읽는다. 활자 뭉치로만 보였던 페이지 속에서 하나의 문장과 만난다. 깊은 바닥 아래에서 누군가의 잠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2016. 1. 6.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