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생활글(1-3/계속)

회복하는 생활 2019.07.16 18:46

2019. 7. 16

[젓가락의 내러티브]


서울에서 친구가 왔다. 마침 와인과 맥주가 넉넉해 따로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술안주를 만들었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먹은 음식의 목록. 순대볶음, 키위 , 사과 , 하나, 마늘빵, 라면 그릇, 핸드드립 커피 . 그리고 와인 병과 맥주 . 도착하자마자 세수는 하지 않고 이빨부터 닦는 여전하다. 사귄지 20년이 넘었지만 만날 때마다 생각지 못한 것들을 알아간다. 때는 무심하고 거친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굳이 드러내지 않는 세심함과 섬세함이 많이 감지된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마치 인덱스를 붙여가는 차근차근 말을 풀어놓는 방식에 청량감을 느낀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피로조차 단순화하지 않고 피로의 출처를 세심하게 헤아려 전달하는 대화의 내러티브가 주는 몰입의 강도에 안정감을 느낀다. 


자주 내어놓는 메뉴이지만 언제나 맛있다는 순대볶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음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떤 음식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기를 구워 먹는 여전히 부대끼는 면이 있어서 육고기가 먹고 싶을 (고기)순대볶음을 먹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쌓인 , 온전히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 필요한 메뉴 또한 순대볶음이다. 그런 메뉴를 한계절에 두번 방문하는 친구에게 내어놓는다. 일상적으로 만드는 메뉴여서 맛엔 초조함이나 과욕이 없어 안정감을 준다. 메뉴의 역사가 2014년에 본격화되었음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각자의 형편과 계획은 조금 가라앉아 있는 듯했고 2인용 카약을 타고 노를 젓는 것처럼 대화를 하다보니 정서의 해수면이 조금 상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새벽 3시를 지나던 즈음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재빨리 그릇을 내어 주었다. 뚝딱! 만들어 내어놓는 리듬이야말로 요리가 주는 작지만 분명한 기쁨이다. 취기가 조금 올라온 탓에 라면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는데,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릇을 비우는 동안 젓가락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대개 젓가락 이후엔젓가락질의 강도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인데, 모든 젓가락질이 목적에 충실했다.  한번은 면발에 집중했고, 면발을 씹는 동안은 계란을 건져내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으며, 다음엔 황태포와 면을 함께 집어올려 라면맛의 바리에이션(variation) 조율했다. 어떻게 젓가락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 건지 물어보니 잠시 고민을 (젓가락질을 멈추진 않고) 거의 마지막 젓가락질에 이르러 이렇게 답했다. “내게 이런 라면을 끓여준 사람이 없다.” 혹여나 국물에 빠트릴까 염려하며 그릇 표면을 활용해 계란 노른자를 건져올리던 조심스런(강도 높은) 젓가락질에 어떤내러티브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2019. 7. 10 

[작별 연습, 작별 운동]


어제도 사람들과 헤어졌고 오늘도 헤어질 참이다. 이별의 명수(名手)가 될 순 없다해도 이쯤이면 누구나 작별의 명수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선물의 명수들이 죄다 여성 동료들이었던 것처럼 작별하는 능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렇다할 말도, 눈길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목례만 겨우 하는 내 작별 인사와 달리 손을 맞잡거나 자연스레 포옹을 하는 그들의 작별 능력이 늘 부럽기만 하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웬만큼 해본 탓에 어색하지 않은 정도는 되지만 살갑게 작별하는 건 아무래도 아직은 어렵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속엣말을 꺼내놓는 한국식(?) 작별 문화가 대화가 아닌 고백에 기댄 관계 맺기와 은근히 연결되어 있다 생각하는 측면도 있겠고, 만나는 동안 충분히 대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조금은 기이한 대화 문화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태도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뭔가 모자라거나 얼핏 무성의해보이는 작별 인사를 애써 건네면서도 마음 한켠엔 살가운 작별 인사를 건네는 능력을 배우고 싶은 바람도 품게 된다. 살가운 작별을 하되 후유증이 없는 작별, 현명한 작별이 가능할까. 살을 맞대지 않고 말을 맞대는 것만으로 충분한 작별도 가능할까. 잘 만나는 능력은 시대의 미덕이어서 배우기 쉽지만 잘 헤어지는 능력은 개인의 사연쯤으로 축소되어 있는 탓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작별하는가'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와 연동되어 있다. 어색함과 궁색함 속에서라도 각자의 작별 연습, 또 작별 운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9. 7. 8

[점멸하는 장소, 점멸하는 희망]


오후 늦게 도착한 낱강 신청 문자. 언젠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들렀다'가 얼굴만 보고 간 분이 있었는데 그때 전달 받은 것이 '다과'만이 아니라 '들렀다가 가는 마음'이기도 했던 것처럼, 그 문자는 저녁 나절에 생긴 잠깐의 시간동안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기도 했던 것. 


늦은 저녁, 어떤 건물은 너무 환해서 들어가기가 주저되고 어떤 건물은 불이 꺼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작은 [읽기] 모임은 불을 꺼놓고 있는 읽기의 시간에 전력이 흐를 수 있게 돕는 작은 발전소 같다. 누구나 각자의 스위치를 올리기만 한다면 꺼져 있던 권리에 불이 들어온다는 자명한 사실. 한 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았던 낱강 신청자의 말을 경청하면서 지금 한 사람이 말로써 밝히고 있는 장소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기와 경청하기라는 자가발전기로 점멸하던 시간. 매일 점멸하는 장소가 있다고, 그렇게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희미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모임. 그런 염원 하나를 사람들 곁에서 말없이 적어두었다.




살림살이의 글쓰기

회복하는 글쓰기 2019.07.02 18:35


냉장고에선 음식이 썩어간다. 다행이다. 음식 쓰레기를 모아둔 통을 이틀만 잊어도 그곳에 구더기가 꼬인다. 다행이다. 아무리 표백하려고 해도, 감추려 해도 기어코 드러나는 것이 생활의 이치다. 생활 속에 썩어가는 것이 보인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표식에 가깝다. 아직 썩지 않았을 뿐인데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두면 모든 것이 싱싱하게 유지된다고 쉽게 믿어버린다. 손쉬운 믿음을 심문하는 것이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음식이다. 신경 쓰지 않으면, 돌보지 않으면 분명히 썩는다는 것을냉장고안에서라도 배울 있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음식물 쓰레기에 꼬인 구더기는 무너진 생활의 증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활이 보내는 긴급한 신호다.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을 그곳은 진창이 된다. 얼음 위에 남아 있던 발자국과 흙먼지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는다는 꽃이 핀다는 신호인 것만은 아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아픈 몸에서 회복하는 몸으로 이행한다는 저절로 찾아오는 순리가 아니라 나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과 마주할 있는 의지를 가질 때만 가능한 행위다. 봄은 진창과 함께 오고 회복 또한 나빠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때만 가능하다. 누구나 생활이 있지만 아무나 생활을 감각하는 아니다. 생활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수신하기 위해선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 생활 속에 머물기 위해선 생활의 면면과 마주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썩어가는 것과 구더기가 기어가는 모습을 수락할 있을 생활로부터 배울 있고 생활을 존재의 버팀목으로 삼을 있다. 생활은 힘이 세다. 돌보지 않으면 결코 함께 없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영영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살피지 않으면 썩는다는 명징한 논리는 글쓰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글쓰기라는 말속엔글짓기라는 관습화된 습성이 남아 있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보다 뭔가 그럴듯한 것을 만들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박과 압박 속에서 모두가 글을 쓴다. 생활의 문법에 비춰보면 글쓰기가 명징해진다. 가꾸고 보살핀다는 그럴 듯하게 꾸며내는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모습을 수락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문장으론 생활을 보살필 없다. 표백된 문장은 썩지 않는다. 무언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강렬한 표식인 구더기 따위는 근처에 수도 없다. 포토제닉한 글쓰기, 희망적이고 교훈을 주는 글쓰기, 훈훈한 내용과 미담이 넘치는 글쓰기를 무턱대고 나쁘다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결코 썩지 않는 글쓰기, 표백된 글쓰기엔 생활이 빠져 있다. 마주하며 버텨내고, 부대낌 속에서 보살핀 각자의 이력이 지워져 있다. 대신 세상의 주인이 되어 우주가 돕는 같은 착각 속에서 막연한 성취감에 도취될 뿐이다. 추상적인 목표와 동기부여의 에너지로만 가득하다. 구체적인 생활을 지우면 마음껏 추상적으로 비약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이 도대체 무어냐고, 모든 것들이 생활이 아니냐고 힐난 섞인 하소연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이렇게 접근해보는 어떨까. 생활이란 살림살이의 목록과 다르지 않다고. 카페에 들어섰을 우리는 쾌적한 인테리어와 마주할 살림살이를 감각할 수는 없다. 살리고 보살핀 이력이 쟁여져 있는 곳이 생활이라는 장소다. 그러니 이런 연쇄를 통한 확장도 가능하다. 관계의 살림살이, 생각의 살림살이, 희망의 살림살이, 나아가 세상의 살림살이. 몸을 움직여 쓸고 닦는 행위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어울린 경험이살림이라면 그곳엔 애닳음과 애끓음의 시간도 스며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되는 것들, 그럼에도 오늘 조금 애써보는 수행성이 살림살이의 목록을 조형한다. 그런 이력이 족쇄나 벗어날 없는 수렁처럼, 때론 얼른 벗어나고 싶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생활을  돌본다는 아무리 애써도 쉽게 썩어버리는 , 언제라도 무너질 있는 것을 수락하며 함께 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임을 꾸린다는 것은 서로의 살림살이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갖은 프로젝트가 살림살이를 대체해버려 이제는 모두가 부대낌 없이 매끄럽게, 상처 받지 않고도 만난다. 언제라도 지울 있고, 돌이킬 있다. 차단 하기를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관계를 맺는 것이친추팔로워처럼 더하기의 연쇄를 떠올리기 쉽지만 어울림이란 많은 것을 선택할 있는 기회의 확장이 아니라 선택의 강도를 최고도로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가위바위보같은 말이다. 살림살이의 현명함은 많은 선택지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선택지를 기꺼이 수락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가위. 바위. . 누구도 가지(제한된) 선택지를 벗어날 없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위를 내거나 바위를 내거나 보를 낸다. 그리고 결과를 수락하고 다음을 함께 기다린다. 대단히 새로운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뻔함 수락하는 , 고만고만해 보이는 결과를 수용하고 밀고 나갈 마주하게 되는 예측불가능한 힘들이 있다.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이 출현하는 곳은 보살피고 부대낀 이력으로 조형한 생활이라는 장소다. 그곳을 지켜내는 힘은 살림살이에서 온다.






▶ 고치 '나비학당' 글쓰기 수업 별강문_2019. 5. 6 ◀






전작 읽기_권여선(1)

회복하는 글쓰기 2019.06.13 13:21



<회복하는 글쓰기> 전작 읽기_권여선(1)


<회복하는 글쓰기>에서 전작 읽기를 시작합니다. 한 작가가 써내려 간 작품을 빠짐없이 따라 읽으며 한 사람이 가닿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희망)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보살펴온 희망과 염원의 걸음 곁에 각자의 발자국을 남겨봅시다. 누군가의 초대로만 열리는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나직하게, 긴 호흡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첫 번째 작가로 권여선의 장편 소설 두 권과 소실집 두 권을 읽습니다. 삶이 있는 곳에 상처가 있으며 곳곳에 편재한 폭력에 바스러져가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 그러나 부서짐 속에서 기어코 빛을 내는 존재의 힘을 마주하게 하는 소설을 함께 읽으며 가혹한 세상을 넘어가는 방식을, 살아내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권여선, <레몬>, 145쪽


1강 <레몬>(창비, 2019) : 2019년 6월 26일 수요일 저녁 7시~9시

2강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저녁 7시~9시

3강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 2019년 7월 10일 수요일 저녁 7시~9시

4강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 2013) : 2019연 7월 17일 수요일 저녁 7시~9시


장소 : 중앙동 <회복하는 생활>(부산시 중구 40계단 길 10, 4층)

인원 : 15명 

참가비 : 3만원(총 4강) 

*낱강 신청 시 강좌당 1만원

입금처 : 우리은행 1002-746-279654 김대성

문의 : 010-9610-1624

신청 방법 : 참가비 입금 후 메시지 보내주시면 답장 드립니다.


진행 : 김대성(문학평론가)

2007년 계간 <작가세계>에 <DJ, 래퍼, 소설가 그리고 소설>로 평론부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습니다. 2013년부터 ‘생활예술모임 곳간’에서 <문학의 곳간>을 기획 및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과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를 썼습니다. 


주최_<회복하는 글쓰기>

협력_생활예술모임 <곳간>






『대피소의 문학』출간기념 김대성 저자와의 만남 :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

던지기 2019.05.30 17:10



※ 강연신청 : http://bit.ly/2VX4fNY

일시 2019.6.15.(토) 오후 3시

프로그램
3시~3시50분 저자 강연
3시50분~4시 휴식
4시~ 자유로운 질의응답과 토론

장소 다중지성의 정원 (문의 02-325-2102)
오시는 길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8길 9-13 (서교동 464-56) http://daziwon.com/?page_id=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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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예술모임 ‘곳간’과 모임 ‘회복하는 글쓰기’ 대표로 활동하는 평론가 김대성의 두번째 비평집”
― 한겨레신문

“바스러져 가는 영혼에 따뜻한 물 한잔…이 시대 문학의 존재 이유”
― 국제신문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서 문학이 담보해야 할 역할을 묻는다”
― 연합뉴스

“비평가의 마지막 세대 혹은 새 비평 정신의 첫 세대”로 평가받는 문학평론가 김대성의 두 번째 비평집. 저자는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절실한 것은 미래나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줄 수 있는 대피소라고 주장한다. 대피소에선 사소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이 사람을 살리고 구한다. 한 잔의 물, 한마디의 말, 몸을 덮어줄 한 장의 담요, 각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 한 토막, 소중했던 기억 한 자락. 대피소에 당도한 이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몸을 벌벌 떨 수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 놓고 몸을 벌벌 떨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대피소의 희미한 불빛은 회복하는 존재들의 몸(flesh)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발열에 가깝다. 누군가의 작은 ‘두드림’만으로도 금세 깨어나는 힘들이 서로를 붙들 때 그 맞잡음이 온기가 되어 대피소를 데운다. 세상의 모든 대피소는 오늘의 폐허를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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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 김대성 Kim Daeseong

1980년 부산 출생. 2007년 계간 『작가세계』 평론부분에 「DJ, 래퍼, 소설가 그리고 소설」이라는 글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국 노동자 글쓰기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쓰며 동아대와 한국해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2013년 생활예술모임 <곳간>을 열어 활동하면서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대끼며 사는 삶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 2015년부터 생활글을 근간으로 <회복하는 글쓰기> 모임을 기획 및 진행하고 있으며 구성원들과 함께 『문이야, 무늬야』(chaaak, 2016)를 함께 썼다. 문화이론계간지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생활예술모임 <곳간>과 모임 <회복하는 글쓰기>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가 있다.






커다란 테이블에 그어진 선분

회복하는 글쓰기 2019.05.29 22:01


단단한 과일을 좋아하는 이유. 콩알정도의 작은 알맹이가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단단하게 커진 것도신기하지만  속을 달콤한 과육으로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는  언제나 경이롭다. 부드러운 과일은 종종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만 사과나 배와 같은 단단한 과일을 베어물 때면 마지막 한입까지 흐트러짐 없는단단함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산뜻한 기분에 젖기도 한다. 단단한 과일을 쥐면  세상이 내게 허락한작은 선물이 지금  손에 도착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시간에도 단단한 과일은 오늘 몫의 단단함과 달콤함으로 충만하리라는 예감 속에서 무디고 느슨한 나의 하루를 매만져본다. 


  공간이 장소가 되어가는 시간성을 체감하는 자리. 그건 단단한 과일을 식료품 코너가 아니라  그루의나무를 통해 매일매일 들여다보는 시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림살이처럼 공간 또한 애써 매만지지 않으면, 쓸고 닦지 않으면, 사람이 들고 나지 않으면 언제라도 폐허가   있음을 알고 있다. 봄밤에 피는 꽃을일러 식물이 동물로 도약하는 순간이라 노래했던 시인도 있지만 공간을 쓸고 닦아 사람들이 머물  있는자리를 마련하는 매일매일의 작은 노동이야말로 장소가 탄생하는 현장이지 않을까 한다. 공간에서 장소로의 이행은 더디게 진행되기에  변화를 알아채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모두가 기꺼이 각자의 손과발을 보태지만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공유지(the commons)  세상 한켠에 있을  있다.  


누군가가 매만지는 살림살이가 공간을 채워가는동안 그곳은 의도 없이 장소가 되어간다. ‘회복하는 생활 한켠에 놓여 있는 커다란 테이블은 공히 그곳의 살림살이라고 할만하다. 공간의 한켠은 무조건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야 한다는  모두가 동의했기에 웹으로 많은 책상을 검색해 주문을 결정하고 건물 입구까지만 배송되는 탓에 1층에서부터 4층까지 여럿이서 뒤엉켜  커다란 테이블을 옮겼다. 며칠 뒤엔  다른 여럿이서 테이블을 조립하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삶의 중요한 결단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테이블 다리를 고정시킬 자리에 구멍을 내었다. 간단한 조립설명서는 있었지만 다리를 고정해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표식이 없었던 탓에  좌우를 재며 ’중심 찾기 위해 표식을 늘려가다보니 테이블 아랫면엔 바둑판 같은 격자무늬가 만들어졌다.  격자무늬를 통해 중심을 찾은(중심이라 믿은)  모두가 짧게 환호했다. 평범한 테이블 아래엔 중심을 찾기 위해 좌우로 그어두었던 선분으로 가득하다.  직선들 덕에 안심하고 중심을 결정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남아 있는 중심 찾기를 위한 선분의 흔적. 오늘 이곳의 테이블 위엔 또다른 선분으로 가득하다.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쓰고, 읽고,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수한 선분이 거듭 그어진다. 각자의 중심을 찾기 위해 집중하는 시간, 서로의 중심을 지켜주기 위해 배려하는 시간, 그렇게 지금의 중심이 아슬아슬하게 찾아지는 시간이 오늘의 테이블 위에 쌓여간다. 글쓰기 또한 무수한 선분들 사이로 아슴푸레하고 아슬아슬하게 나타나는 중심 찾기와 다르지 않다. 아니 책이라는 것이   커다란 테이블을 닮아있다.  공간을 장소로 붙들고 있는 살림살이의 무게중심인 것처럼  커다란 테이블은 각자의 삶속에서쓰이는  권의 책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내가 썼지만  힘으로만   아님을 커다란 테이블- 위에서알게 된다. 단단한 과일이 익어가는 시간 속에도 무수한 선분이 그어지고 있으리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좀처럼 풀기 어려운 기억을 책이라는 형식으로, 손에 쥐어지는 선연한 물성으로, 사람의 손이라는 것이 책을쥐고 펼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알맞은 볼륨으로, 책은 존재의 장소가 된다. 그런  곁에서 사람 또한 잠시나마 장소가   있다. 


 평범한 사각형 테이블 위에서 오늘도 사람들이 모여 김을 매고 밭을 가는 것처럼 무언가를 읽고 쓴다. 서로의 말에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뒤면에 남겨진 선분을 서둘러 드러내거나(고백) 서로가감춰둔 선분을 애써 발견하려 하지 않고(심리주의) 잠깐 안심하며 곁의 사람을 향해 욕심 없이 선분을 긋는다. 문턱이 없는  평범한 테이블은 누구나 앉을  있는 공통의 자리다.  자리에서 만큼은 누구나 두려움 없이 선분을 그을  있다. 어떻게 긋고, 어디서 끝을 맺을지   없다고 해도 곁에 있는 누군가가 분명점이 되어줄테니 안심하고  선분 긋기를 시작할  있다. 테이블 위에 나타나는 점은 어떤 순간의 중심이자 누군가가 믿고 기댈  있는 중심이다.  그루의 나무에서 수많은 과일이 단단하게 맺히듯이  커다란테이블 위에 그어지는 선분 속에서도 위계도 우열도 없는 중심이 맺힌다. 잘 익은 과일[중심] 하나가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발아래로 굴러가 멈춘다. 누구나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어떤 욕심도 없이 발아래로 굴러온  과일[점을 향해]을 베어문다[선분을 긋는다]. 



* 여기가 (우주의) 중심입니까?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와 견줄만한 '테이블 쇼트'(테이블을 설치한 직후 그 자리에서 앉아서 찍은 이혜미 님의 사진). 모든 것을 아득하고 아늑하게 보이게 한다.



[회복하는 글쓰기 4기]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 않은 책-쓰기> 2강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