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얼굴들

오후 6시의 햇살

by 종업원 2016. 8. 20.

2016. 8. 20



                                                          누구의 것도 아닌 화분_2016. 대청동



늦여름 오후 6시의 햇살은 분노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간 뒤 남은 잔향의 메아리 같은 햇살을 마주보며 걷는다. 긴박하고 중요한 것이 다 빠져나간 햇살 아래에서 이 걸음이 ‘나는 강하지 않다’라는 세계로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된다. 강함을 열망하는 마음도, 더 이상 강하지 않음을 아쉬워하는 마음도 없이 ‘나는 강하지 않다’라는 세계의 입구에서 너무 빨리 도착한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뒷걸음치거나 돌아서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초입에서 숨죽여 동동거리는 뒤쳐진 마음을 쓰다듬으며 다정함의 세계를 희구(喜懼) 한다. 


먼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촬영 중이라는 말에 급히 전화를 끊고 안심하게 된다. 통화 중이 아니라 촬영 중이라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도서관 근처에서 끼니를 챙기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잘 먹지 않지만 빅세일을 하고 있어 믹스커피 50개짜리를 샀다. 그 자리에서 박스를 드르륵 뜯어서 손에 잡히는대로 건네 주고 싶은 친구를 떠올리기도 전에 그리워했다.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산복도로의 가파른 계단에 앉아 보리차 같은 바람을 맞았다. 골목에서 어울려 뛰어노는 희귀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야옹’하고 소리내어 인사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금새 알아버린 외국어 한 문장을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전하고 싶은데 도저히 번역할 수 없음을, 아니 번역하는 사이에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릴 것 같아 말없이 잠깐 앉아 있었다.






'얼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산책(1)  (0) 2018.03.22
어떤 후기, 어떤 바람  (0) 2017.12.27
백패킹  (0) 2016.07.05
  (0) 2016.05.31
시민의 얼굴(1)  (0) 201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