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18
Rainbow의 ‘rainbow eyes’를 듣다가 리치 블랙모어라는 걸출한 기타리스트의 행보에 대해 생각했다. 역사적인 밴드를 이끌었다는 그의 이력보다 괴팍하고 독단적인 성격 탓(?)에 멤버들과 겪었던 숫한 불화가 먼저 떠올랐다. 바로크 음악의 화성악을 기타에 도입한 그의 시도 덕에 잉위 맘스틴(YNGWIE MALMSTEEN)이라는 세기의 기타리스트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잉위 맘스틴 또한 숫한 멤버들을 교체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90년대 후반 열심히 읽었던 <Hot Music>에 그의 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보컬과 그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내게 잉위 맘스틴의 첫번째 이미지는 자신이 고용한 보컬에게 아내를 뺏기고(?) 홀로 남겨진 거실의 쇼파에 앉아 어마어마한 연주를 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의 뒷모습이다. 물론 잉위 맘스틴을 들으며 늘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광수가 쓴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이다. 특히 영채의 죽음을 확신하고 경성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의 풍경. 모두가 잠들어 있는 객실에서 홀로 깨어 비로소 ‘참인생’과 ‘실생활’에 대해 실감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 바깥이 어두운 탓에 창에 오롯이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환희에 차 바라보는 바로 그 모습! 일렉 기타 하나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80년대의 속주 기타리스트의 숨쉴틈 없는 속주 에드립에서 나는 ‘형식’의 그 미소를 본다.
그리곤 장마가 시작되는 오늘,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근래 다른 자세로 보고 있는 구로사와 아키라를 떠올렸다. <모퉁이 극장>의 김현수 대표가 수년 전 수년 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세미나를 하며 모은 귀한 자료를 내게 건네주었고 그 첫장에 인용되어 있던 마틴 스콜세지와의 대담의 한 대목 때문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영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웃음)”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는 말에 나는 낮게 신음을 뱉으며 자세를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쏟는다는 것, 너털웃음으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삶.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1961)의 프롤로그 시퀀스를 숨죽이고 보다 ‘영화가 이 세계보다 더 큰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어 나는 버스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뒤늦게 읽게 되었다. “형편없는 영화 속에서 어리석은 자들과 함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필연적인 운명의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해주는 것”,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히로세 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히로세 준은 들뢰즈가 영화의 인식론을 세계 전체로 확장함으로써 세계를 인식론적으로 다시 파악하려 했음을 강조한다. “디스토피아의 에티카”라는 언급 옆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기록해두고 싶다. <‘장르’가 세계를 (다시) 만든다> 하나 둘 고쳐나가며 개선되는, 그리하여 마침내 시스템에 안착하는 ‘시행착오’가 아닌 기꺼이 감행할 수 있는 ‘실패’에 집중하고 싶다. 곧 출범하게 될 생활예술모임 <곳간>이 가야할 방향 또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이었으면 한다.
이 메모는 퇴근 길에 듣게 된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의 <津軽海峡冬景色(쓰가루 해협 겨울 풍경)> 때문이다. 내 ipod에는 100곡 정도의 엔카가 들어 있고 나는 웬만해서는 그 노래들을 스킵하지 않는다. 웅장하고 비장한 연주를 뚫고 나오는 엔카 가수의 목소리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는 질감 같은 것이 짙게 묻어 있다. 농염한 섹소폰 연주에 언제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탓도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수천번, 수만번 반복해서 불러왔을 법한 노래에 깊게 배어 있는, 사력을 다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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