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8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차를 몰아서 강릉까지 왔다. 거리로 치자면 400km가 넘는데, 가까운 곳조차 차로 가보지 못했기에 여러모로 긴장이 되었지만 방법이 없어서 차를 몰고 먼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포항을 지나고 울진 어귀에 이르렀을 때, 거리로 치자면 200km 정도 지났는데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7~8년 전에 내 친구 세희가 늦은 밤 차를 몰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세희가 내게 이르기를 ‘일 마치자마자 너 보려고 쉬지도 않고 한 달음에 온 거야. 너가 너무 보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난 그게 세희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라고 여기고 한 번 씩- 웃어주고 말았는데, 오전부터 오후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일한 뒤에 곧장 강릉까지 가는 길 위에서 7~8년 전쯤에 세희가 일 마치고 조금도 쉬지 않고 바로 내게로 와주었던 그 마음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그저 빈말이 아니라 세희가 느끼는 그대로를 내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울진은 우리 어머니 고향이기도 해서 지나가는 마음이 조금 남달랐는데, 가만히 보니 이 길이 30년 전 명절 때마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문암리에 있던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추석이나 설날에 아니 둘 중에 한 번은 꼭 강원도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아버지 형제들을 만나곤 했는데, 난 그날이 언제나 힘들고 무서웠다. 그날이 좋은 날이고 명절이어서 한 번도 힘들고 무섭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울진을 지나는 그 길 위에서 나는 30년 만에 내가 그때 참으로 무섭고 힘들어 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버스로 간다는 건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고, 버스표도 없었기에 포항이나 울진 같은 곳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했고, 때로는 서서 가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혹여라도 엄마나 아빠를 잃어버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엄마와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길에서 맞을까 봐도 무서워했던 것 같다. 그때는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워서 그 담배 냄새 때문에 토하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내게 할머니 댁에 가는 날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친척들을 볼 수 있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켠에는 무서움과 두려움, 걱정을 잔뜩 짊어지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나조차 그것이 무섭고 힘들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울진을 지나서 삼척이라는 이정표를 보면서, 그러니까 한 300km를 달렸을 즈음에 나는 30년 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그러니까 전날까지 일하다가 아이 둘을 데리고 먼 길을 나서야 했던 내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게 되었다. 늘 일하는 사람이었던 이 두 사람은 그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 번도 힘들다고 한 적이 없고, 입을 꾹 다물고 별 말이 없었던 그 10시간을 견디며 고향 가는 길. 누구도 이 두 사람에게 힘드냐고 물어보지 않았겠지. 하루도 쉬지 않고 긴 시간을 일하다가 명절이기 때문에 자식된 도리를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 먼 길을 가야 했던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강릉 가는 길목에서 떠올렸다.
강릉에서 열렸던 트레일러닝대회에 참가했다. 4월엔 제주도에서 열렸던 트레일러닝대회에 참석해 36km를 즐겁게 누렸던 바가 있어 겁도 없이 50km를 신청했는데, 함께 걷기로 했던 세희가 무릎이 아파서 포기를 한 탓에 내내 혼자 걸었다. 너무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포기를 못하는 남자'라 꾸역꾸역 끝까지 걸었다. 전날부터 약한 감기 기운 때문에 몸이 더 빨리 지치고 곳곳이 아파서 35km를 지나면서는 도무지 뛸 수 없었다. 절반정도 걸었을까, 문득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목소리를 적어봐야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 녹음기를 켜서 한구절씩 말하며 짧은 글을 써보았다. 걸음과 목소리가 발을 맞추어 한구절씩 써나갔는데, 코로만 숨 쉬는 동안 내뱉는 글에 최종규 선생님 말투가 묻어났다. 조금씩 천천히 하나하나 말을 내어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목소리가 어느새 내 발걸음에, 내 숨에, 내 마음에 내려앉아 있었던 것일까. 처음 해보는 걸으며 목소리로 남기는 글쓰기였지만 어떤 이가 늘 그렇게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두려움 없이 넉넉하게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목소리로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고 별볼일 없는 글일 테지만 코로만 숨 쉬며 뛰다가 걷고, 걸으며 잠시 썼던 이날을 오래오래 기억하고자 그때 목소리로 적었던 글을 풀어 여기에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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