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안착할 곳이 필요한 터라 언제나 ‘뭍’에서 씌여지지만 그곳은 대개 ‘물’과 가까운 곳이기 마련이다. ‘말’은 어디든 자유롭게 오고갈 수가 있어 어디서든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자유로움은 정박지를 찾지 못해 쉽게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도 지치지 않고 ‘말’을 하는데 여념이 없는지도 모른다. 문장은 물과 뭍 사이에서 출렁거리지만 한사코 물을 등지고 있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물에서 멀어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한순간, 물속으로, 물의 너머로 제 몸이 빨려 들기를 바라는 심정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간곡한 문장은 하나의 단어나 토씨의 어긋남에도 저 스스로를 보존하던 기반을 모조리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그렇게도 정처없거나 불안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 발이라도 헛딛는 순간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는 그 위태로움과 간절함은 외려 외마디의 말과 전 생애를 바꿔도 좋다는 바람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문장은 말의 허망함을 피해 뭍으로 올라왔지만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과 뭍 사이에서 고작 출렁거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문장’은 갈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제 나름의 깊이로 새기는 불가능한 것들의 목록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제 몸 전부를 던져야 하는 불가피한 순간처럼 문장은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온다. 한발 늦은 깨달음과 달리 문장은 언제나 한발 먼저 도착해 있다. 괴물처럼, 이방인처럼, 아이처럼, 갑작스럽게 마주친 야생 동물처럼, 누군가의 동공에 포착된 내가 모르는 ‘나’처럼, ‘당신’의 얼굴처럼, 문장은 불현듯, 도착한다. 문장은 사이렌처럼 다급하고 간절하게, 혹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어떤 기척처럼 온다. 한 문장을 삼키고, 한 문장을 뚫어내고, 한 문장을 지움으로써 문장은 도착할 수 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문장들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문장들은, 삶의 불가피성과 문장의 허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저마다의 의미로 꽉 차 있는 겨울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제각각의 고유한 빛을 발한다.
이미 도착해 있는 문장이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나는, 불행하게 예감한다. 그렇게 사라짐으로써 문장은 제가 맡은 소임을 다할 것이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그는 ‘언어의 수용소’에서 제 순서를 기다리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문장은 결코 제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수 없다. 저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제 몸을 뚫고 올라온 문장에 ‘얼룩이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성복, 「느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사라진 문장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 흔적 위에서 우리는 ‘자살suicide’이라는 말을 배운다.
저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도래할 문장에게 자리를 내어준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살’이라는 말의 형체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도착해 있는 문장 속에서 지워진 문장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 그것은 문장 속에서 문장이 되지 못한 문장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배움의 여정은 달려가고 있으나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 가야만 하는, 어디에 당도할지 알 수 없는 화물열차에 올라탄 이주민이나 수용소로 향하는 열차에 결박당해 있는 이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목적지를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을 내맡기고 갈 수밖에 없는 상태.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달려야(배워야) 한다. 그 여정 속에서만 문장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쓰지 못한 문장, 미처 쓰기를 마치지 못한 문장, 이미 썼지만 내가 알아보지 못한 문장, 아직 가고 있는 문장, 곧 도착할 문장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플랫폼을 떠날 수 없다.
문장은 ‘소라게’처럼 짐짓 모른 척, 누군가가 버린 집에 제 몸을 구겨 넣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 냥, 이미 도착해 있다. 국경을 넘어온 자와 거주지를 가지지 못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으로, 무심히 밖을 쳐다보는 그 표정으로. 그러니 어서 그 문장의 여권을 확인해보라. 얼룩이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소리 내어 읽어라. 불가피 하기에 가능한 문장을, 우리를 ‘우리’일 수 있게 하는 그 조건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뭍(공동체 안)에서 물(공동체 밖)로 도약할 것을 종용하는 요청에 응답할 때, 우리는 타자가 우리에게 보낸 유일한 메지시를 수신할 수 있는 장소에 겨우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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