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 구절, 단어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시간을 흘려보낸다. 밑줄을 긋거나 그 앞에서 무위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순간을 음각해보지만, 나는 분명히 이 대목을, 이 구절을, 이 순간을 흔적도 없이 잊고 말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이 자리로,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결코 활자들을 붙들어 들 수 없다. 아니 활자가 내게로 오는 순간, 그것은 활자가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가 되어, 소리의 육체(육성)가 되는 순간이기에 이 순간은, 목소리가 머무는 지금-여기-우리의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내가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잊을 줄 알면서 이 순간 앞에서 무위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이 자리로 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을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직감하기(예감, 육감) 때문이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밑줄을 치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다시 돌아왔을 때, 왜 돌아왔는지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를, 다만 바랄뿐.
'회복하는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 4월 21일 (0) | 2011.04.24 |
---|---|
불가능한 문장 (0) | 2011.01.23 |
저기요 (1) | 2011.01.23 |
건반을 치듯, 아래로 아래로 (0) | 2010.04.16 |
긴머리 노란 청년 (0) | 2010.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