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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살림짓는 작은 아이

by 작은 숲 2024. 8. 31.

2024. 8. 31


책장 한쪽에 그림책을 쌓아두었다. 느긋할 때 읽어야지 마음먹었지만 먼지가 쌓일 지경이어서 매일 아침 눈길만 주고 선뜻 펼치지 못했다. 어제는 어머니 생일이라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었다. 즐거웠고 감사했고 뿌듯했다. 푹 자고 일어나 녹차를 마시며 ≪티치≫(팻 허친스 그림/글, 박현철 옮김, 시공주니어, 1997)를 펼쳐보았다. 

이 그림책은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어둔 장면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엔 크기와 색깔이 다른 옷이 눈에 띄었다. 다시 보니 얕은 언덕에 나무를 세우고 줄을 이어 빨랫줄을 만들었는데, 푸른 하늘 같은 배경을 그리지 않아서 파랗고 노랗고 빨간 옷가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세워둔 나무 아래엔 풀이 더 길게 자라 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나무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다. 덩치가 작은 티치는 형과 누나 사이에서 늘 뒤처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또한 달리 보면 형과 누나가 늘 동생인 티치를 곁에 둔다는 얘기고 그건 챙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셋은 무엇이든 함께 한다. 

자전거 타기, 연날리기, 악기 다루기, 나무를 잘라 무언가를 짜기, 화분에 씨앗 심기까지 형과 누나 몸짓은 크고 뚜렷해서 충분히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티치는 작게만 움직여 못 갖추거나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림책에서 티치는 형과 누나와 같은 쪽에 있지 못하고 늘 다른 쪽에 덩그러니 놓인 것처럼 보인다. 화분에 씨앗 심기에 이르러 티치가 가져온 작은 씨앗이 화분에서 싹이 트고 무럭무럭 자라는데, 이를 보고 놀라는 형과 누나 곁에서 마침내 티치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는다. 

이 이야기 얼개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는 건 아이들에게 놀이와 일하기가 나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자전거 타기와 연날리기, 악기 다루기를 하던 아이들은 스스로 톱질을 해 나무를 자르고 망치와 못으로 무언가를 짠다. 그렇지만 무엇을 짰는지는 굳이 그리지 않는다. 톱질과 망치질을 목적이나 쓸모로 엮지 않고 그저 쓱싹쓱싹 썰고, 퉁딱퉁딱 두드리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그건 악기를 다루되 '연주'가 아닌 그저 악기를 두드리고 불고 만지는 모습만 그리는 까닭과도 이어진다. 그리고 커다란 삽으로 흙을 파 화분에 옮겨 담고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운다. 줄기가 자라 아이들이 놀라며 바라보는 모습은 담되 굳이 꽃이나 열매가 맺히는 것까지 그리진 않는다. 이 그림책은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도 살림짓기를 하며, 스스로 짓고 꾸리는 일을 하며 어울려 자란다는 뜻을 펼쳐놓는다. 

 

* 팻 허친스 그림/글・박현철 옮김, ⟪티치⟫, 시공주니어,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