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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말(투)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2023. 1. 9.
버려진 자리, 남겨진 자리 2022. 12. 30 가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어느 러시아 기자는 고레에다 영화를 일러 “남겨진 사람을 그린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고레에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의 알짬이었다. 영화 데뷔작 (1995) 또한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빛을 쫓아 갑작스레 곁을 떠나버린 이(이쿠오)로 인해 어둠 속에 남겨져야 했던 이(유미코). 이 시종일관 칙칙하고 어두운 톤을 유지하는 건 이 영화가 상복을 벗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말한다. 유미코가 줄곧 이쿠오의 죽음에 붙들려 있는 건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은 다르다. 이라는 제목은 무언가를 좇아 갑작스레 여기를 떠난 이쿠오(들)의 알 수 없는 열망(이끌림)을 가리키.. 2023. 1. 9.
뒷부분 김덕희 전시 , 영주맨션, 2022년 12월 18일 2022. 12. 26.
Take this Waltz—아픈 세상에서, 함께 춤을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 1934~2016)의 라이브 명반 (2009)의 수록곡 ‘Take this Waltz’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레너드가 특유의 진중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을 소개하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DVD로도 발매가 되었기에 그 실황 공연도 관람한 바 있는데, 그는 중절모를 벗어 한손에 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 옆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다. 그가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의 곁으로 다가가 그이를 소개할 때 우리는 샤론이 단순히 백 보컬이 아니라 레너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앨범의 첫 트랙인 ‘Dance me to the end.. 2022. 12. 19.
삶터(현장)-씨앗-매듭-곳간_문학의 곳간(91회) [91회 문학의 곳간] 안내 91회 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 2017)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간 만들어온 영화 만큼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글 또한 정갈하고 사려깊습니다.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이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TV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이어서인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에 깃들어 있는 생생함을 구현하는 데 탁월한 작가입니다. (2011)의 한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가게와 집이 위 아래로 나뉘어 있는 스낵바 2층 방에서 아이들이 짧은 여행(이자 가출)을 떠나기 전 둘러 앉아 각자가 바라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영화는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와 같은 시선으로 작지만 맑은 바람을 이야기.. 2022. 12. 8.
끄트머리 눈곱처럼 작은 글씨 2022. 12. 7 ‘농촌 어린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이오덕 선생이 1958년부터(1952년 것도 한 편 들어가 있다) 1977년까지 20년 동안 주로 농촌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그때그때 모아두었던 것을 엮은 책이다. 지난날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품은 시집이라는 드문 책이지만 으레 작고 연약한 것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티나지 않게!) 은근히 업신여기며 한쪽으로 미뤄두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오덕 선생의 발자취를 뒤쫓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침판 머리말」을 읽자마자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단박에 여러 꼭지를 읽지 못하고 한두 꼭지정도만 겨우 읽고 오래도록 뒤척인 탓에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야 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맑.. 2022.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