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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비평의 쓸모(1) : 책날개

by 작은 숲 2013. 9. 6.

2013. 9. 6


누군가 내게 다른 이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곤 '안부'를 전해달라고 한다. 나는 '매'가 되거나 적어도 '비둘기'가 되어 '안부'를 전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무사하다. 전해야할 '안부'의 목록을 손에 쥐고 잠깐 생각해본다. 누군가 내게 다른 이(것)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나의 안부'가 아닌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것)들에 대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상태. 매개자가 된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이지만 해볼만한 일이다. 비평이 '매개 역할'에 충실해본적이 있었던가. 용접 하는 것과 매개하는 것의 거리. 아니 매개로서의 용접.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연작을 읽다가 문득 보게 된 책날개의 소개를 옮겨둔다.

박완서는 삶의 곡절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를 반드시 글로 쓰고야말겠다는 생각으로 고통의 시기를 살아냈다. "이것을 기억했다가 언젠가를 글로 쓰리라." 숙부와 오빠 등 많은 가족이 희생당했으며 납치와 학살, 폭격 등 죽음이 너무나도 흔한 시절이었다. 이름 없이 죽어간 가족들을 개별적으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처음 글을 쓴 목표였다. 그러나 막상 글을 통해 나온 건 분노가 아닌 사랑이었다. 그는 글로써 자신을 치유해나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만 갇혀 있지 않고 당대의 전반적 문제, 가부장제와 여권운동의 대립, 중산층의 허위의식 등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 직간접적으로 의식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문인이었다. "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남는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말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박완서는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다. 그의 글은 그를 닮았다.

간명하고 정확하며 감동적인 소개글이다. 글쓰는 이의 욕망을 지긋이 누르고 작가를 불필요하게 칭송하지 않으면서 독자들이 '박완서'의 문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짧은 소개글은 '매개'라는 역할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내게 또 다른 '비평'의 질감으로 다가온다. '소개글'이라는 가외의 이름밖엔 가지지 못했고 글쓴이의 이름조차 병기하지 못하지만 이 글은 책과 저자에 기꺼이 '날개'를 달아준다.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던 <문지>판 시집에 실려 있던 간명하고 감동적인 책날개 글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떤 시집은 책날개 소개글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있다. 때론 자신의 이름표를 붙이지 않은 글들이 바로 그 이름의 무게만큼을 덜고 더 멀리, 더 많은 이들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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