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생활

20xx년 x월 x일

by '작은숲' 2011. 4. 25.

 
  붉게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은 미끈한 상처다. 입술은 상처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딱지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획득한 매끈하고 볼륨 있는 피부다. 그러나 매끄러운 딱지가 사람들의 기억까지 덮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쉬지 않고 자신의 입술 끝을 물어뜯었으며 타인의 입술을 빨거나 자신의 입술을 타인에게 내맡기는 데 집중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입술의 자리에 있던 상처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신과 타인들의 타액에 입술은 점점 더 매끄러워져 갔고 도톰해져갔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입술을 사랑했고 또 볼륨감을 더 해 가는 자신들의 입술에 만족했다. 꼭 그만큼 상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만 갔다. 기억은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잊혀져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잊혀진 기억을 입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입술에 의해 굳게 닫혀진 캄캄한 입 속에 밝고 빛나는 어떤 형체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난 후였다. 그들은 입 속의 혀로 기억을 전도시켰고 혀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서로의 혀를 탐하기 시작했다. 입술은 입 속에 감추어져 있는 혀로 가기 위한 통로에 불과해졌다. 모든 기억은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입술은 입 속의 혀를 기억해내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붉고 촉촉했다.

 
  혀는 입술처럼 늘 드러나 있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매순간 기억을 해내어야만 했다. 입 속에 무언가 있다, 붉고 도톰하며 따뜻한 것이, 라고 부풀어 오른 볼륨감만 남은 입술이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입술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레 혀로 옮겨가게 되었고 혓바닥 위를 맴돌던 기억들은 입 속 여기저기를 헤매다 간혹 식도로 넘어가기도 했고 이빨 사이에 끼어 화석으로 남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기억들은 타인의 혓바닥과 몸을 섞었다. 한사람의 입 속에서 뒤엉키던 기억‘들’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기억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고민이 오래될수록 혓바닥‘들’은 더욱 격렬하게 서로를 휘감았다. 기억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입 속의 여기저기로 밀리고 쓸려 다니다 타인의 혓바닥으로 옮겨 가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기억은 처음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그것의 모습은 거칠게 보이기도 했으나 혓바닥보다 더욱 도톰하고 미끈한 모습을 한 것도 있었다. 입 속의 기억이 입 밖으로 내 뱉어지는 순간이었다. 말(言)은 그렇게 하여 세상에 넘쳐나게 되었다. 입 속에 있어야할 것들이 말의 몸을 빌려 입 밖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갔다. 그러나 무언가를 잊고 있거나 잃어버렸다는 상실감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입술에 침을 묻히며, 타인의 입술을 빨며, 혓바닥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런 상실감을 달래려 했다.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그러한 것처럼 기억은 상실감이라는 부재의 존재태로 몸바꿈을 했다. 더 이상 입 속에서도 기억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들이 흘러넘쳤으며 그만큼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대한 망각의 속도는 빨라져만 갔다.



'회복하는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그렇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되는 날  (5) 2011.07.05
2011년 4월 24일  (0) 2011.04.26
2011년 4월 23일  (0) 2011.04.25
2011년 4월 21일  (0) 2011.04.24
불가능한 문장  (0) 2011.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