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 에어콘이 고장나서가 아니라, 그저 문을 열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거주하는 곳의 문을 거의 열어두지 않는다. 며칠 간 연구실 문을 열어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듯했고 마지 못해 아는 척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요며칠 문을 열어두고 음악을 들으면서 논문 몇 편을 읽고, 한 시인이 보내준 시 몇편을 읽고, 보다가 둔 소설도 몇 장 읽었다(정확하게는 화장실에서 읽었다). 2년전에 발표했던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손 보았고, 남은 시간은 대개 업무를 보는 데 보냈다.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었고, 자꾸만 그러고 싶었다.
2.
언젠가,
청탁 원고를 더 이상 받지 않고 시집 해설만 한달에 두 편, 2년 정도 꾸준히 쓰고 그걸 책으로 묶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글을 통해 세계를 규정하거나 구축하고 싶은 욕심보다 좋은 문장 속에 단단한 사유들을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더 크기 때문은 아닐까. 좋은 소설을 읽으면 그것을 보다 정밀하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좋은 시를 읽으면 가만히 그 시간을 말없이 머금고 있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때문일까. 한 시인이 메일로 보내온 정성스레 다듬은 시집 원고를 몇 편 읽으면서 저녁나절부터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싶은 마음을 조금 다스렸다, 아니 겨우 추스렸다.
3.
불을 끄고 눈까지 감고 쇼파에 누웠다. 섬모와 같은 것이, 다지류의 곤충들이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있는 듯한 모습이 눈꺼풀에 어렸다.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저녁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음식이 상하니 xx부터 먹으라는 당부를 하기 위한 전화였다. 불현듯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거신 거다. 내게 걸려오는 많은 전화는, 내가 거는 많은 전화도 내 어머니가 거신 전화와 같은 것이 있겠지. 불현듯 생각이나서, 무언가를 당부하기 위해. 내가 미약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용을 문자로 넣었지만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4.
나는 그저 문을 열어두고 내 방문 앞을 지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불편을 기꺼이 감당하며 작업을 하고 싶다. 요즘 나는 연구실에 있는 동안 늘 음악을 듣고 있는데, 전혀 책을 읽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있는 밥을 만들어 먹으면 복도에 그 냄새가 가득 차겠지. 사람들이 빠져나간 곳에서 홀로 양파를 까고 후라이팬에 그것을 볶으며 냉장고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떠올린 후 그것들을 종종 썰어서 함께 볶아 먹은 적이 있다. 무엇을 먹을 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를 볶다가 냉장고에 남은 음식으로 '요리'를 마무리 했던 기억. 내가 요리를 시작한 시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
불필요한 말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말을 계속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 말들이 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본전 생각 때문은 아니고, 아마도 덫에 걸린 것이겠지. 덫을 놓는 사람도 덫에 걸린 시궁쥐도 덫에 걸린 것은 매한가지다. 나는 그저 문을 열어두고 싶었다.
6.
문제는 날벌레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는 것. 문을 꼭꼭 닫아두면 모기에게 물릴 염려가 없다. 작년 여름, 모기에게 물렸던 적이 몇번 없다. 그만큼 철저하게 문을 닫고 지냈던 것. 얼마 전 후배들과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 한 데서 저녁을 맞은 적이 있다.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저녁의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냈었다. 그때 모기에게 무수하게 뜯겼었는데, 검은 양말을 끌어올리는 내 모습을 포착한 한 후배의 말에서 자그마한 위안을 얻기도 했다. 문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나는 지금 별로 철저하지가 못하다. 철저하기 위해선 문을 꼭꼭 닫아야 하고 모기에게도 물리지 않아야 한다. 모기에게 물릴 일이 없어야 한다. 자꾸만 문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나는 지금 지긋지긋 하다. 하루에 커피를 필요한 경우, 한 잔씩만 마시던 내가 몇 잔이고 마시는 것도 그때문일 텐데, '아메리카노'의 맛을 모르는 나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예의 그 싸구려 설탕과 프림 탓에 입안 가득 들러붙는 지긋지긋한 맛을 반복해서 느끼고 있다. 내가 마시는 건 커피일까? 맥심일까?
7.
다행히도 점덤 피곤해진다. 아무 것도 한 게 없지만 피곤해지니 조금 안심이 된다. 집으로 가서 문을 닫고 자야겠다. 내일 또 종일 문을 열고 있어야할 테니. 가야지, 자야지, 문을 꼭꼭 닫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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