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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무명의 삶

by 종업원 2015. 12. 18.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삶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보인바 없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평범한 소설’(『스토너』)을 덮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커다란 질문을 관통시킬 수 있는 답변을 해낼만한 능력은 없지만 그럼에도 응답해야 한다면 ‘작은 기쁨’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 소박한 어휘 조각은 곧잘 삶의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다소 긴급하게 부정적인 문맥으로 말하고 싶다. ‘작은 기쁨’은 ‘소박한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욕망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작은 것을 요구한다는 욕망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욕망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거나 평범과 보통의 세계를 보살피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들은 거듭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 자문 속에서 규모에 대한 답변이 아닌 가치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작은 기쁨’은 미덕이라기보단 차라리 욕망의 파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끝내 채워지지 않아 끝없이 요구하면서도 그 요구를 스스로 정당한 것이라 믿게 되는 작은 기쁨이 우리의 삶을 좀먹고 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작은 기쁨’ 속에 숨어들고 있지 않은가. 소소한 소비에 기뻐하고 소소한 복종과 지배를 탐닉하고 있지 않은가.

 

욕심 없는 사람들에게, 내 동료들에게, 소박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싶다. ‘작은 기쁨’에 붙들려, 그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지 않은가. 작은 기쁨조차 가져보지 못한 ‘스토너’는 자수성가한 그 자리에서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 욕망의 나날로 채워갈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쉼없이 경영하고 또 투기해 욕망의 재산 목록을 늘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렵게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겸손하며 소박한 그의 태도를 보며 아마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말은 틀렸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음’(능력)과 ‘하지 않음’(선택)이 욕망이나 자본과 관련된 문제일 때 사람들은 쉽게 ‘하지 않음’(선택)을 폄훼한다. 서둘러 ‘정신승리’라는 흉물스러운 냉소로 딱지 붙인다. 사람들은 늘 ‘능력’에 붙들리기 때문이다. 다른 가치보다 항상 능력을 앞세워 ‘삶’의 잣대로 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화려한 능력이 아니라 담담한 선택이다. 누구나 매순간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의 선택을 통해 결을 달리하는 것이지 능력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치에 대한 도피처가 될 때 나는 그것이야말로 삶의 재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훼손될 때로 훼손된 ‘작은 기쁨’의 가치를 구해내고 싶다. ‘작은 기쁨’은 어떤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택할 수 있는 이만이 ‘작은 기쁨’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비유해서 말해본다면 선택이란 ‘쥐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에 가깝다. ‘작은 기쁨’은 내 손 아귀에 쥐어져 있는 소박한 쟁취가 아니라 이제는 내 손(욕망)을 벗어난 것들이며 그건 세속의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킨다. 소박한 쟁취엔 수다스러운 표정들이 난무하지만 ‘하지 않음’으로서의 선택엔 표정이 없다. 『스토너』는 그런 표정 없는 선택으로 직조된 소설이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엔 보석 같은 구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담담한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가늠하기 어려운 미지의 풍경과 빈번하게 마주하게 된다. 그건 누구나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매력은 없는듯해도 곁에 두고 사귄 이라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알게 되는 사람의 면모와 유사하다. 어떤 능력은 보지 않으려 해도 훤히 드러나지만 어떤 선택은 아무리 보려 해도 볼 수 없으며 영영 알아차릴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런 선택으로 삶을 직조해나가는 사람의 생을 일러 비밀스러운 삶이라 부르곤 했다. 오늘 우리네의 삶이 바로 그 비밀스러운 삶의 역사에 기대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비밀스럽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감추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감춘 적 없으니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마땅한 열쇠도 없다. 열쇠가 없는 비밀. 그것은 삶과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고유성이란 그렇게 긴 시간에 걸쳐 응축된다. 더해서 말해본다면 고유한 삶은 (무표정한) 선택을 통해서만 축조된다. 쥐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에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쥐고 있지 않고 이미 놓아버렸기에 그/녀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런 이들의 삶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알려하고 설명하려고 해온 시도, 명확하지 않음을 조건으로 수락해온 일, 나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동안 해온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해오고 있는 일, 쥐는 것이 아니라 놓은 일, 다름 아닌 죽음. 『스토너』에 담담하게 포진해 있는 몇 명의 죽음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이 소설은 주인공인 ‘윌리엄 스토너’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끝을 맺고 있기도 하다. 모든 서사가 ‘죽음’을 축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죽음’으로 수렴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소설 전반에 중요한 좌표처럼 자리하고 있는 담담한 죽음의 표지야말로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장소다. 스토너의 유일한 스승인 ‘아처 슬론’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알려하지 않는다. 스토너 또한 스승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스승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숙고한다. 시골 촌부인 아버지의 죽음과 이은 어머니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 앞에서 스토너는 그들이 쌓아올린 업적에 대해 말하기보다 그들이 놓은 것들의 가치를 헤아린다.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스토너의 담담한 애도사.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를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153쪽.

 

아버지와 어머니가 미주리 주 중부 분빌 마을 근처의 작은 농가에서 평생을 살았던 것은 그곳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이었다고 해도 훗날 떠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그 선택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는 삶의 힘이다.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누구도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부의 삶속으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오랜 시간 그들을 바쳤던 ‘고집스러운 땅’만이 이 부부의 육신 안으로 스밀 수 있다. 스토너조차 부모의 죽음 앞에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선택으로 응집된 소박한 삶 앞에선 침묵할 수밖에 없다. 스토너의 삶 또한 할 말이 거의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평생 그를 괴롭혔던 동료 교수 ‘로맥스’에게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문득 감사하다는 생각”(376쪽)을 하는 대목이나 한없이 사랑스러웠지만 ‘이디스’의 방해로 다가가지 못했던 딸 그레이스와도 “할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380쪽)았다는 대목은 말년에 이르러 삶에 체념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씌어진 게 아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 속에서 벌어졌을 그 모든 선택을 인정하고 수락할 수 있을 될 때, 쥐고 있던 마지막의 것 또한 담담하게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309쪽.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들.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라는 말은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간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에 한에서만 지칭될 수 있다. 조금 덧붙여본다면,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 또한 ‘스토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쫓으며, 아름다운 그것이 분명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놓을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소박한 삶’에 이끌리는 이름 없는 이들이 오늘의 ‘스토너’다.

 

 

<세 계절 읽기 모임> 5회_중앙동 upstair / 2015.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