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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10대라는 비평

by 종업원 2015. 12. 25.

2014. 12. 28 / 2015. 12. 20

 

작년 이맘 때쯤 생활예술모임 <곳간>의 송년회가 송도 집에서 열렸고 그날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집을 가득채웠다. ‘이내’와 ‘곡두’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1층 서재에서 잠깐 서영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학의 곳간>에 몇번 참여했고 <생각다방산책극장>에서 또 몇번 만나 안면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 이야기를 듣곤 가끔 걱정스레 떠올린 것말고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는데 이날 지갑에 가득한 영화표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해동안 본 영화에 대한 짧은 촌평이 이어졌던 것이다. 재미 있었다거나 재미 없었다라는 간명한 규정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좋았던 영화였다라는 식의 솔직하면서도 진중한 감상평이 무르익어가면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한 짧은 소회를 그야말로 핵심적인 이미지 하나 하나로 갈음해가는 서영 씨의 단호한 입장이 워낙 단단하고 실팍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몸을 기울여 듣기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거인>(김태용, 2014)과 <보이후드>(리차드 링클레이터, 2014)에 대한 촌평이 뇌리에 오래 남아 있다. 위탁되어 살고 있던 곳을 떠나게 된 주인공이 자신의 소지품을 동생에게 전하는 <거인>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서영 씨는 ‘어쨌든 희망적이었으면 하고 또 희망적이어야 한다’며 ‘10대를 그린 영화이고 같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10대이므로 그가 죽어서는 안 되며 어떻게든 잘 살아야 한다’는 바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주인공의 죽음을 예감했었는데 서영 씨의 힘차고 단호한 희망 앞에서 그 불길한 예감이 학습된 파국론의 기계적인 적용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나,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한 약속을 10년이 흐른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아들과 무심코 잊어버린 아버지의 대화를 상기시켜주었을 때 <보이후드>의 알짬이 그 장면 속에 고여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날의 대화엔 여지껏 모르고 있었지만 안다고 착각하고 있던 10대에 대해, 그리고 10대의 희망에 대한 짧지만 분명한 배움이 있었고 그건 내게 하나의 비평으로 다가왔다. 그 겨울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나는 ‘10대라는 비평’에 관해 종종 생각했고 그 생각을 짧은 글로 정리해보고자 했다. 문법적으로 자연스러운 <10대‘의’ 비평>이 아니라 <10대‘라는’ 비평>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특출난 10대로부터 도착한 메시지가 아니라 그간 우리가 모르고 있던, 혹은 이미 알고 있다고[정확하게 말해 알 필요가 없다고] 규정해왔던 10대라는 위치가 그 자체로 이 사회를 향한 비평의 장소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10대‘라는’ 비평>의 장소는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사안을 촉구한다. 첫번째, 10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10대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 10대들 스스로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 10대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 둘러 싸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물음 앞으로 소환된다. 그 물음 앞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무능력을 직시할 수 있을 때 10대라는 미지의 세계 입구에 겨우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두번째, <10대‘라는’ 비평>은 그들이 어떤 비평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 바로 그들의 존재 그 자체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며, 비평한다는 것이다. 그건 10대가 위협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10대가 언제나 ‘위험한 자리’에 서 있어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위험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다름 아닌 우리가) 그들을 그곳까지 내몰았다는 것이다. 10대라는 비평(critic)은 그들이 내몰린 위태로운(crisis) 자리를 우리에게 알린다. 10대의 위험을 전달받는다는 것, 그것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 끝내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요시다 다이하치, 2012 / 한국개봉 2014)

그래서일 것이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요시다 다이하치, 2012)에서의 어떤 외침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싸우자, 이곳은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영화부 구성원들이 외치는 이 필사의 고함은 세상을 향한 선언과 다르지 않으며 어떤 팀에서도 스카웃 제안이 들어오지 않는 야구부 선배의 쉼없는 스윙, 오직 허공만 가르는 그 스윙이 “드레프트가 끝날 때까지는.” 변함없이 이어질 거라는 단호한 다짐 또한 세상이라는 허공을 가르는 외침이며 선언이다. ‘키리시마’가 없는 배구부에서 거의 처음으로 주전으로 뛰게 된 수비수의 애씀은 또 어떤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팀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의 안간힘은 자신이 받아낼 수 있는 능력이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을 알지만 실패할지라도 상대의 스파이크를 향해 몸을 던지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 반복 속에서 실패는 더 이상 한계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실패가 동력으로 전환되고 실패를 선언으로 발명하는 순간. “괜찮다면 응원만이라도 하러 와줘. 이길 작정이야, 다음 번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엔 ‘키리시마’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키리시마 한 명이 동아리 활동을 그만 둔 것뿐인데 크고 작은 관계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향 관계, 쉼없이 주고 받는 에너지의 흐름. 단일한 시선이나 하나의 관점으론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10대들의 무늬가 저마다의 시도 속에서, 저마다의 실패 속에서,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그 반복 속에서, 하나의 발명술이 위태로운 실험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10대‘라는’ 비평>은 그 ‘실패의 발명술’이 이루어지는 실험실의 입구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작은 표지일 것이다.

 

4월 말즈음 중앙시립도서관은 흡사 대중 목욕탕을 방불케 했다. 이용객들로 빼곡했기 때문이 아니라 쉼없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놀랍도록 거대해져서 도서관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도서관 전층이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로 흡사 점령당한 듯했다. 자리가 없어 열람실 입구 귀퉁이에서 힘겹게 책을 읽어가는 와중에 여중생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쉼없이 내 앞에 와서, 간이 책받침대 너머에 놓아둔 충전 중인 핸드폰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거의 10분에 한번씩 와서 내 영역(!)을 침범하길래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으로 타인에게 방해를 주고 있음을 넌지시 알리려고 했는데, 외려 불쾌하고 어이 없어하는 퉁명스러운 시선을 돌려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핸드폰 확인을 하는데 내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이미 2층 성인 열람실에 자리가 없어 1층으로 내려와 겨우 자리를 잡은 탓에 옮겨갈 곳이 없었다. 그런 탓에 가방을 싸서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오자마자 충격적인 풍경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시험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데이트 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 열람실은 그저 책가방을 두기 위한 보관소이고 이곳은 그들에겐 접선 장소였던 것! 왜 하필 이곳을 접선 장소로 삼았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다른 곳을 우리가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10대들의 도서관 점령은 일종의 시위에 가까운 것이라 봐야 한다. 이 사회의 전 구역을 독점한 것에 대한 10대들의 시위 말이다. 생각해보면 비교적 평화로운 2층 ‘성인열람실’은 그들의 접근을 원천봉쇄한 점령이고 독점이기도 할 것이다. 등급을 나눈다는 것은 점령과 독점을 정당화하는 논리이지 않은가. 자격증 취득과 취직 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채운 ‘성인’ 무리는 10대들의 관점에서는 뻔뻔한 점령자들이다. 그런 논리로 우리가 도시의 모든 곳을 점령해버렸으니 공공기관에 대한 10대들의 점령은 어쩌면 막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이 책받침대를 타고 넘어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던 한 여중생의 퉁명스러운 시선은 바로 염치없는 점령자를 향한 힐난이었던 것이다. 서영 씨와의 대화 속에서 경험한 짧은 배움의 순간과는 상이한 말없이 힐난하던 그 시선 앞에서, 말하자면 <10대‘라는’ 비평>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송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키드 노스텔지어 : 한국 십대의 초상>(박성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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