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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좌절됨으로써 옮겨가는 이야기

by 종업원 2016. 1. 6.

 

잠수와 읽기 

 

어떤 ‘읽기’의 순간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잠수를 닮아 있다. 읽기란 우선 고요해지는 일이다. 숨 참기, 아래로 내려가 경계와 대면하는 것, 고요. 고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고요 속에서만 겨우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상태에서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그걸 알기에 오늘도 고요해질 수 있어야 한다. 고요해지지 못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문장이 있었다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 자책한다. 오늘 내가 놓쳐버린 문장들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고 잠수 한다. 고요 속으로 내려가 잠깐, 겨우 읽는다. 활자 뭉치로만 보였던 페이지 속에서 하나의 문장과 만난다. 깊은 바닥 아래에서 누군가의 잠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하나의 문장에 밑줄을 친다. 그렇게 겨우 부표 하나를 만들고 나면 숨이 차 서둘러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잠수해 부표가 있던 그 자리까지 힘차게 내려간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부표가 또 다른 부표를 가리키고 있고 나는 그것에 다시 표시만 해두면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읽기란 그런 것이다. 잠시 숨을 참고 고요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것도 아닌 그 순간에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읽기가 큰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속도와 힘을 가지게 될 때, 그렇게 어떤 물살에, 알 수 없는 물결에 몸을 맡기게 될 때, 읽기의 항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잠수가 항해가 되는 일, 고요가 폭풍이 되는 일. 같은 자리만 맴돌며 반복해서 한계를 반복해야 할 것 같은 잠수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잠수-읽기가 내 힘만으론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돛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하기, 불화하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에 겐자부로의 두터운 ‘만년의 작업’을 읽는 일만큼이나 나는 ‘우리가 이곳에 모여 있는 지금이라는 상황’ 또한 자세히 읽어내고 싶다. 본질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에 맹렬하리만큼 관심을 가져왔던 거 같다. 부차적인 것이야말로 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어떤 맹렬함에 뒤따르는 도착(倒錯)일 가능성도 농후하겠지만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것이 늘 중요한 좌표였고 때로는 목적지였다. 그건 의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본질과 부차적인 것의 고정된 자리(관념)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일이기도 했다. 새삼 내가 이끌렸던 것이 정말 주변적인 것이 주는 불온한 에너지 때문이었나 되묻게 된다. 중심과는 조금은 다른 에너지가 주변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부터 중심으로, 본질로 진입하는 다른 경로를 찾는 일, 없던 길을 개척하는 일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진입로라는 말을 조금 더 풀어가보자. 나는 그것을 이야기성(narrative)이라고 부르고 싶다. 중심과 주변의 고정된 위계를 바꿔보는 일과 시작과 끝이라는 선형적인 시간성을 거부하는 일은 ‘전복’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곳과 저곳을 잇는 다른 경로란 결국 이야기를 하는 것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그간 읽고 쓰는 일에 열심을 부려왔지만 ‘이야기 하기’에 관해 직업적인 투철한 의식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으니 ‘이야기성’에 이끌려 왔다는 진술은 어쩐지 어색하고 생경하지만 그 이물감을 넘어서는 어떤 진실이 있음 또한 숨기고 싶지 않다. 내가 이끌려왔던 ‘이야기성’이란 주인공의 모험담을 만들어내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응시/고발하는 전통적인 작가의 위치에서 행하는 것이라기보단 누군가가 말하고 또 누군가가 그 말을 들음으로써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공동 행위를 말한다. 내게 이야기란 그런 성질의 것이다.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일상적인 행위의 주고받음 속에서 조용히 알게 되고 불현듯 만나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 이야기란 혼자만의 힘으론 할 수 없으며 철저하게 타인에게 기대어 있는 행위다. 혼자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한계로부터 도착하는 경이가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그 유한성과 행한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환원불가능성의 곤경(한나 아렌트), 신체적 취약성(주디스 버틀러)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란 홀로 침잠하는 초월적 우주가 아닌 서로에게 기대어 더듬어가며 걷는 오솔길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기대어 있는 이야기의 의존성을 한계가 아닌 가능성으로 바꾸는 일에 이끌려왔다고 해도 좋을까. 그런 이유로 현실의 숱한 한계와 대면하고 응시함으로써 그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왔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는 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한계와 대면하고자 했다. 당장 그 문제적 한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짐짓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모르는 척 하고 있을 수 없음, 유별날 것 없는 그 소박한 행위가 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화’야말로 내 삶의, 내 이야기의 주요 테마이지 않은가. 모든 불화가 빠짐없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오랜 재활의 시간을 견뎌낸 뒤 몸과 마음을 추슬러 하게 되는 일은 다시, 이야기를 하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한계와 대면해야 했고 그것은 또 다른 불화의 씨앗을 잉태하는 일이었다. 나는 끝없이, 아니 끝까지 이야기(불화) 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을까.

 

오에 겐자부로는 간호사들 앞에 선 강좌에서 narrative와 relate의 친연성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을 사용하며 이야기하는 것, narrate 하는 것은 알린다는 라틴어에서 온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오에 겐자부로, 『말하고 생각한다 쓰고 생각한다』, 채숙향 옮김, 지식여행, 2005, 189쪽) 이야기를 한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이야기하기를 통해 구축한 통로로 ‘중요한 사실’이 도착한다. 중요한 사실이란 접근불가능한 정보나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사이에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매번 알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사실’이라고 해도 좋다. 오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간호사들 앞에서의 강좌를 마무리 한다. “그렇게 협동하는 수많은 개인, 개인의 내러티브가 모이고 완성되어 조직으로써의 병원의 내러티브가 이룩되어 간다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큰 소설이 완성되는 과정과 같습니다.”(190쪽) 타인의 고통에 의식적으로 무덤덤해야만 환자를 대할 수 있는 간호사들의 내부에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어루만지는 통로가 있음을 인지한 오에는 그것의 조직적인 구성과 완성을 바람을 ‘병원의 내러티브’라는 말로 담아내고 있다. 그 말 앞에서 이런 질문을 품게 된다. ‘이곳의 내러티브’는 어디에 고이고 있을까. 사려 깊게 말하고 듣는 것만으로 ‘장소(이곳)의 내러티브’를 구축할 수 있을까. 그것으로 충분할까. 이야기하기란 모으고 구축하는 일이 아니다. 차라리 부수와 해체하는 일에 가깝지 않은가. 사람들 사이에 없던 통로를 만드는 일이란 응당 있어야 할 통로(관계망)가 없어도 무방한 것으로 만든 기존의 체계와의 대면 없이는, 그것과의 불화 없이는 마련할 수 없지 않은가. 인정에 호소하는 고백과 달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불온하다. 그들은 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해왔으며 그런 이유로 숱한 경계를 넘나들며 보이지 않던 장벽과 철조망을 폭로해왔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현실의 한계를 대면하고 부딪치며 넘어서려는 시도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또한 그런 한계와의 대면, 한계와의 부딪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이야기하기란 불화하기와 다르지 않다. 늘 누군가를 향해 있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 없고, 늘 누군가에 기대어 있지만 하나가될 수 없다.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공통 이름은 망명자다.

 

 

겹침의 동력학 : 파국이라는 소설 쓰기

 

평생을 준비하는 작품이 있는 작가에게 쓰는 행위와 삶을 구분하는 것을 쉽지 않다. 일생의 작품을 품고 있을 때 그/녀는 쓰는 인간이며, 줄곧 썼던 인간이며, 끝내 쓸 인간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가 그런 작품이다. 필생의 작품이란 최종 목적지에 안착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지도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감춰진 보물이나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쓰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말하는 작업. 필생의 작품은 미래를 여는 문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거슬러 뒤로, 다른 곳으로 끝없이 돌아가게 하는 없던 문을 연다. 선형적 시간의 질서를 바꾸고 공간의 성격을 변형시킨다. 소설은 언제나 그랬다. 현실의 한계를 발구름판 삼아 발돋음 하며 도약하는 모든 소설은 지금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을 향한다. 오늘이라는 발구름판을 딛고 도약하여 다른 시간을 향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익숙하거나 잊고 있었던 아련한 ‘과거’가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시간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의 서사적 동력은 ‘나(조코)’의 원체험 장면으로 반복해서 회귀하는 것이지만 한 개인의 전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억으로 돌아오는 것은 구심력 때문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허물기 위해서다. 다시 돌아나가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다. 평생 붙들(려)고 있던 장면과 장소로 돌아가 원체험의 공간을 부수는 일은 지금까지 썼던 모든 작품을 해체(deconstruction)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필생의 작품으로 삼아온 ‘익사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온 말년의 소설가가 마주하는 진실은 실험 연극 집단 ‘혈거인’의 ‘마사오’와 ‘우나이코’에 의해, 동생 ‘아사’에 의해, 아사의 전언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가 데리고 온 이방인 ‘다이오’에 의해, 그의 아들 ‘아카리’에 의해 매번 파괴됨으로써만 겨우 가닿을 수 있다. 『익사』의 주인공인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인물들은 ‘훼방꾼’이면서 ‘협력자’다. 마찬가지로 평생 썼던 작품은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발구름판이기도 하다.

 

훼방하면서 돕는다는 것, 장애물이면서 발구름판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들이 서로를 대체적인 존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겹쳐 있는 존재로 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익사』의 서사를 이끌고 가는 힘은 ‘겹침의 동력학’으로부터 비롯된다. 겹침이란 ‘수락’과 ‘부정(성)’이라는 양립불가능한 두 힘의 긴장을 가리킨다. 오에 겐자부로는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 국가의 시간과 가족의 시간, 남성의 시간과 여성의 시간을 겹쳐 놓는다. 이때의 겹침이란 포개어두는 것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부딪치게 하는 것. 어느 쪽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살피며 끝없이 부딪치게 하는 것. 『익사』를 읽으며 나는 오에 겐자부로가 줄곧 그런 식으로 소설을 써왔음을 예감했다. 아버지의 죽음 곁에 누워 있던 한 아이, ‘코기’라는 환영의 이름은 가상의 ‘나’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이기도 하며, 아버지의 익사를 멀찍이서 바라만 봐야했던 유년의 ‘나’이면서 그런 유년의 나를 속수무책으로 매번 마주해야만 하는 노년의 ‘나’이기도 하다. 그것이 오에 겐자부로 소설 속의 (겹쳐 있는) ‘나’이다. ‘나’란 수많은 요인으로 휘몰아치는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있는 존재의 이름이며 그런 이유로 하나의 ‘나’로 귀결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복수’(複數)의 이름이기도 하다. 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복수의 주체(들)는 가라앉거나 떠오른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주체는 타살과 자살 사이에 있으며 익사(溺死)와 순사(殉死) 사이에 있다.

 

타살과 자살, 익사와 순사란 결국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죽음이지 않은가라는 불가항력의 차이 없음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그 한계를 사력을 다해 분별하는 일이 오에가 가진 저력이라 생각했다. 숨죽이고 오에의 작품을 읽으며 그가 오랜 시간동안 수락과 부정의 정신을 고도로 유지하는 행위로써의 소설 쓰기를 지속 해왔음을 느꼈다. 그것이 말년에 이르러 써왔던 작품들을 다시 불러내어 부정하는 행위, 전면적인 자기 비판(부정)을 수락하는 것으로써의 ‘쓰기’를 감행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오에는 그의 동료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on late style)에서 많은 감흥을 받았음을 여러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말년의 양식”(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장호연 옮김, 마티, 2012, 29쪽)은 아도르노가 베토벤의 후기 작품을 두고 평가한 예술 본연의 정수에서 밀려나 기록에 가까운 것으로 좌천된 어떤 형식을 이론적 길잡이로 삼아 조화나 화해, 포용과 같은 합일성이 아닌 비타협과 균열 및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파국과 죽음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표출하는 양식을 가리킨다. 사이드에 의하면 말년의 양식이란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현실에 저항할 때라야만 생겨나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이며,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살아남는 것”(38쪽)을 의미한다.

 

‘나’가 쓰려고 했던 ‘익사 소설’은 전면적인 자기 비판과 마주함으로써 좌절되지만 바로 그 좌절의 자리가 역사의 유령들을 지금-여기-이곳에 불러내는 집단적 행위로 전환된다. 어떤 이야기의 자기 파괴의 부정성의 동력이 오랫동안 수장되었던 이야기를 불러내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익사 소설’ 집필이 좌절된 자리에서 젊은 여성 연극인 ‘우나이코’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가 집필했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개봉하지 못한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의 영화 시나리오를 파편으로 백 사십년 전 강간 당하고 살해 당한 어머니들, 민중 봉기에 앞장 섰던 여성들의 넋을 십수 년 전 자신이 겪었던 강간과 강제 낙태를 겹쳐놓음으로써 사라진 그들의 목소리, 유령의 목소리를 이곳에 생생하게 복원하고자 한다. 『익사』를 직조하고 있는 ‘이야기’는 좌절됨으로써 ‘나’를 벗어나 다른 이의 이야기로 옮겨가며,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잊혀졌고 동시에 도래 할)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 간다. 그곳엔 인간의 의지를 통해 견지되는 오에의 낙관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조건을 끌어안고 살아온 삶에 대한 겸허한 존중이 자리하고 있다.  

 

 

<세 계절 읽기 모임 3 Seasons Reading Club> 1회 / 오에 겐자부로, 『익사』(박유하 옮김, 문학동네, 2015) / 중앙동 upstair / 201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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