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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사무라이들(1)

by 종업원 2013. 7. 28.

2013. 7. 28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사무라이의 반란>(Samurai Rebellion, 1967)을 보다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던 하나의 쇼트.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던 칼이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 자리에 사무라이의 단호한 표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날카로운 칼날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사무라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내는데(아마도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줌-인 한 것이지 않을까) , 칼에서 태어난 사무라이는 칼과 한몸인 것. 헌데 칼-사무라이가 베는 것은 한갓 지푸라기 더미일 따름이다. 칼을 잡은 사무라이가 해야 하는 일은 영주가 쓸 칼의 성능을 확인하는 것이었던 셈.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가 내뱉는 사사하라 이사부로(미후네 도시로)의 말 : "평생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 

영주의 비윤리적인 처사에 맞서 사사하라(家)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맞서야될 상대 앞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데, 이 '살아 있음'의 정체란 '적에 대한 분노'라기보단 차라리 '불가피함에 맞서는 것'이 아니었을까? 옳고 그름의 잣대가 붕괴되고 있는 세계 앞에 선 '칼을 든 존재'는 자신이 '총'에 쓰러질 것을 알면서도 '칼'을 들고 나아가야 했던 것. '칼을 든 자'의 책무 혹은 불가피함. '칼'을 든 우리가 오늘, 고작 지푸라기 더미 밖에 벨 수 없다고 해도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 사사하라(칼을 든 자)의 '반란'은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혁명' 같은 것이 아니다. 단지 불가피함에 맞서는 것. 지는 싸움일지라도 한몸(칼-몸)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이다. 

사사하라는 에도로 가는 길목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잠들어 있는 그의 손자 토미 옆에 작은 단도 하나를 남겨 두고.



사무라이의 칼날. 사무라이는 베어야할 대상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칼(劍)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郎, 1920~1997)만큼은 앞머리가 있는 게 더 어울린다. 아마도 <요짐보>(구로사와 아키라, 1961)에서의 어마어마한 카리스마 때문인 듯.


칼은 자신을 드러내기에 언제나 그 출처를 할 수 있지만 총은 은폐되어 있어 출처를 확인하기 힘들다. 오직 결과만이 있을 뿐.


총에 맞지 않은 오른팔을 든 후에 사무라이는 쓰러진다. 이 순간 사무라이는 영주의 충복이 아닌 제 삶을 스스로 가지는 사무라이가 된다.


      

아이 앞에 놓인 단도는 마치 사무라이에 대한 애도를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총'의 시대에서 그 누구도 사무라이를 애도 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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