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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그곳’의 유산과 미래의 생활정치

by 종업원 2013. 1. 21.
2012. 8. 13





1. 다시생활정치로


아마도 꿈을 꿨던 것 같다한참을 자고 일어나 지인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며 지난 밤의 꿈을 헤집어 봤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누운 상태로 전화를 받다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꼼지락거려본다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간다그러다 별안간 허리를 곧추세워 바른 자세로 앉는다. 20분 간 통화에‘만’ 집중해본다멀티태스킹이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외려 퇴화에 가깝다고 한 말에(한병철) ‘응’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 해도 무관한 일상적인 행위에 나름의 형식을 부여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작은 의미를 조형해보기 위해서이다무용한 원칙을 세워 그것을 근기 있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자본제적 체계 속에서 나름의 버릇과 습관을 벼려가는생활정치의 수행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 핸드폰 벨소리가 없는 곳에서 ‘희미해지는 나’, ‘겹쳐 있는 우리’


5일 간의 독서여행 기간 동안 핸드폰 벨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핸드폰 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도 없었다다만 선생과 동접들의 말을 듣기 위해 기울어지는 몸을 보았다그 말들을 들으며 적을 수 없었고 적으며 들을 수 없었다선생과 동접들의 말을 옮겨 적는 동안 ‘나’의 생각이 끼어들어 ‘말의 길’이 급히 바뀌기도 했다그 말들을 다 듣지 못했고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어긋남’ 일러주는 희미한 길이 있었다듣기란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을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것듣기란 ‘꼴’을 ‘틀’에단근질 하는 공부와 다르지 않다는 것온전히 듣지 못한 그 ‘말’들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더듬거리며 한발 한발을 옮겼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가 가리키는 곳이 다름 아닌 ‘나’라고 한다면 잘 들리지 않는 ‘말의 길’을 따라 옮가간 곳은 ‘희미한 나’이거나 ‘겹쳐 있는 우리’였던 듯하다.




3. 오른발의 의심과 왼발의 복종


불경스럽게도 <독서 여행>으로 내딛는 첫번째 걸음의 동력은 의심과 의구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약자도 강자도 가질 수밖에 없는 의심은 일견 공평해보이기까지 하다의심이란 반성이나 회의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의심할 때에야 비로소 타자가 보인다”(김영민, <언제 의심하면 배울 수 있는가>)는 말이 한갓 경구인 것만은 아닌듯하다. ‘나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길을 걷기 위해서혹은 나름의 길을 내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야 한다자신을 의심해야겠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구조/관계체계)을 의심해야 하겠지만 문제는 의심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 다음에 무엇이 오는가에 있을 것이다나는 그간 ‘의심의 힘’으로 글을 썼고 만남과 관계를 조형해왔다더러아니 자주 나의 한계와 부족함을 체감했지만 나름의 애를 써서 의심하며 걷고글을 썼고말을 나누었다그리고 그 의심에 갇혀버렸다. ‘의심’을 통해서 만난 이들달리 말해 자본제적 체계나 제도적 구조에 의해 부여된 자리를 불태우고 이동한 곳에서 만난 이들과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의욕을 발견했지만 지금은 ‘이 사람들만 아니라면’에 고착되어 있는 상태였다의심이 관계를 조형했지만 바로 그 의심이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없던 길”을 가는 이에게 ‘의심’은 봇짐과도 같은 것처럼 보인다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혹은 무엇을 비워내느냐에 따라 ‘희망’의 방식도 달라지는 것일테다의심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했지만 바로 그 의심 때문에 나는 길을 잃은 셈이다의심의 힘으로 내딛은 오른발이지만 왼발만큼은 ‘꼴’과 ‘틀’의 관계로현명한 복종과 현명한 지배가 계시하는 길을 더듬어 찾는 데 의욕을 내보고자 했다.




4. 흙과 보석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오래된 인문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오는 전거를 찾아보는 것’을 이번 독서 여행의 중요한 정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여교재의 내용들을 전거로 삼아 현실의 문제에 도입할 때 발생하는 비약과 위험함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텍스트에서 캐낸 내용을 현실에 바로 적용할 때이 또한 새로운 것차이의 나르시시즘으로 현실(과 현장)그리고 타인을 지워버리는 손쉬운 ‘소비인문학’으로 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산된 폐허 속에서 흙묻은 보석을 건져올릴 때’ 감춰진 보석의 빛에 현혹당해 오랜 시간 그 보석을 감싸고 있었던 ‘흙’(역사)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흙묻은 보석을 건져올린다는 것은 ‘밝은 눈’으로 보석에 묻은 흙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흙과 보석’이 함께 조형해내고 있는 시간을 건져올리는 것이 아닐까텍스트를 헤집어 보석을 간취한다는 것은 보석에 묻어 있는 ‘흙’도 함께 캐내는 것이다그러니 보석을 가리고 있던 ‘흙’이야말로 현재의 문맥과 접속할 수 있는 매개인 셈이다검거나 여전히 붉은 그 흙들은 형체없이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그저 놓여 있을 뿐이었다말없는 그 흙을 앞에 두고 몇 마디의 말을 주고 받고 몇 자를 기록했다흙으로 쓸 수 없었고흙 위에 말과 글자를 새길 수도 없었다.




5. 긍정의 일관성


위대한 개인주의(귀족주의)를 하나의 틀로 도입하는 이 <독여>에서 우선 배우고 수행해야할 첫번째 전거란 ‘예yea의 급진성’이겠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개인주의’, ‘귀족주의’를 방법론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 개인주의가 위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거들을 제시하며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해보였다. ‘위대한 개인주의’라는 주제가 위험한 틀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만큼 그 틀에 각자의 꼴을 단근질하면도 그 단근질이 ‘긍정’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의 수행성 또한 고민해야했다풀어말하자면 위대한 개인주의가 어째서 위대한 것인지에 대한 전거와 근거를 매번 발견하고 발화함으로써 꼴을 담근질하는 것. ‘위대한 개인주의’가 응하기와 상호작용의 행위가 아니라 독아론이나 초월주의에 침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기어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6. ‘랜덤의 시대’에 돌아보는 ‘취향의 급진성’


위대한 개인주의의 급진성에 대해 긍정하기 위한 소박한 전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그 위대한 개인이 사회에 속해 있는가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속해 있지 않고 초월해 있는가라는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취향’의 문맥을 살펴 이 문제에 접근해보려고 했다가치를 제시하고 스스로 서는 것자신의 윤리관을 정립하는 것이 ‘홀로’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과잉긍정을 통한 성과 주체가 행하는 자기계발의 다른 판본이 아닌어떤 식으로든 그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푯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를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으로서의 개인의 취향’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보고 싶었다이를테면 서화 소장가 김광수가 “수집한 많은 고서와 문헌이 화가와 서예가의 안목을 높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푸른역사, 2007, 76)는 평가나 장서가 이하곤이 읊었던 글(“우리집에는 무엇이 있나 서가에는 만 권 서책이 꽂혀있네 맹물 마시며 경서를 읊조리노니 이 맛을 정말 어디에 견줄까”)에서의 ‘맹물의 맛’이 함의하고 있는 바가 개인의 취향이 한갓 스스로를 뽐내기 위한 패션이거나 반대로 자발적으로 선택권을 시스템에 양도하는 ‘랜덤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취향’이란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는 별도로 개인과 개인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장()의 의미를 가진다취향이란 사적인 만족에 국한되는 호사취미처럼 보이지만 가치를 생산하는 것과 무관해보이는 그 노동이 역사의 힘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해왔다그러니 내가 ‘선비들의 취향’에서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생활정치’였던 것이다무엇을 주고받고 있는가말을 나누고 어휘를 부려쓰는 것생활양식을 조형해가는 것.




7. 제도와의 부대낌 속에서 일구는 비평의 장소


제도란 선택이 아니라 주어져 있는 하나의 틀이다제도가 설정해놓은 이 조건이자 한계는 끊임없이 재설정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일 터중요한 것은 ‘제도와 존재의 핵심을 동일시 하지 않을 때 개인은 보편성을 자각할 수 있다’(헤겔-지젝 신남례)는 데 놓여 있을 것이다제도도 역사의 산물이며 개별자들의 노동으로 중축되어 있는 점에서 제도를 그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좀 더 유연하게 제도와 부대끼는 형식을 고안할 필요성이 요청된다그 과정에서 제도에 의해 드러나는 개인의 ‘뒷면’을 보게될지도 모른다물론 제도 속에서는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금강초롱).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윤종빈, 2005)의 ‘승영’은 군대라는 폭력적인 제도에 저항하려 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도에 동화되어버린다(적과 싸우려다 적을 닮는). 제도와 동일시 하지 않으면서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제도를 무심하게 대하는 것제도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었다그것은 제도 속에서 장소/현장을 구축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동무’의 자리란 어떤 것인가동무관계를 한시적으로 제도를 벗어난 위안의 의미로 귀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자본제적 체계 속에서 ‘장소’와 ‘현장’을 구축하기 위한 어울림의 노동그 변침(變針)의 노동이란 “사물과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함께 살아가고 어울리는나누는그리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그 전부”(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한겨레, 2011, 15)로서의 ‘비평’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8. 틀을 뒤집어 쓰는 꼴의 윤리성


“‘비평적 개입’이란 자기 자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타인에게 몸을 끄--고 나아가는 방식”(김영민앞의 책, 13)이라면 ‘꼴’만으론 ‘비평적 개입’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스스로 자기를 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면 ‘지옥’처럼 보이는 타자야말로 ‘자신을 전면적으로 수정해보는 계기’(k)가 되는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타자로서의 틀나 아닌 사람을 만나서 온전히 뒤집어 쓰는 ‘현명한 복종’의 수행성(k)이란 ‘나’로부터 나올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아울러 복종하는 자가 지배하는 자를 키울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복종을 하는 자는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자이어서 그 비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키워갈 수 있다(k)[가령토마스 칼라일의 다음과 같은 언급, “하인이 영웅을 알아보려면 일종의 영웅이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새겨둘 필요가 있겠다그렇다면 틀을 뒤집어쓰는 ‘꼴의 윤리성’ 또한 마땅히 마련되어야할 것이다틀을 소비(기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상호작용의 생산성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그 앞 자리에 ‘인용’과 ‘번역’을 기록해둔다.


물가에서 바장이며 물이 묻을까 염려하기보다 물 속에 뛰어들어 아예 강을 건너가보는 것그것이 틀을 만나는 것이며 틀을 뚫고나가는 것이다.”

-k



9. 믿음이란 무엇인가 희망공동체


틀을 뒤집어 쓰는 것은 분명 ‘능력’이다자신을 위협하는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에고’와 ‘허영’을 내리누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이처럼 ‘한 발’로 할 수 없으며 ‘홀로’ 할 수 없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우리가 잃어버린 어휘, ‘믿음이란 무엇인가?’(신남례이 막역한 어휘 위에 ‘뜻’과 ‘희망’그리고 ‘공동체’를 덧대어본다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그것은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다름 아닌 죽음 앞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때 ‘믿음’이 깃들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죽음 앞의 인간이란 ‘말 앞의 존재’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용하던 ‘어휘’가한 시대의 ‘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말을 주고 받는다는 것’그 행위야말로 죽음 앞의 존재라는 것존재의 유한성 앞에서 겸허해짐으로써 ‘믿음’이 깃들 수 있는 ‘자리’를 상호관계 속에서 마련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수직적 관계의 전통을 기리며 동물이라는 매개에 관하여


사라져버린 백제의 흔적그 폐허 속에서 위대한 인간과 인문(人紋)의 아름다움을 건져올리기 위해 우리들은 작고 낮은 도시를 에두르며 바장였다백제를 보려 했으나 보지 못했고 백제를 걸으려 했으나 걷지 못했다그 길에서 내가 만난 것은 반동적이게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백제(사라진 전통)의 아름다움’에 관해 적은 글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대지와 바다와 창공이 하나로 통합되어버린 지금인간의 힘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란 사실 ‘염원의 전통’이 사라졌음을 가리킬 뿐이다. ‘염원’한다는 것은 대지의 문제를 하늘을 통해서인간의 문제를 신을 통해서 손쉽게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염원이란 주고 받는 것이다기원(주고)과 감사(받음)를 위해 신에게 바쳤던 것혹은 대지에하늘에바다에 바쳤던 것그런 면에서 제사란 수직적 만남의 전통의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수평적이고 동등한 관계만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지금수직적 만남을 통해 마련되는 갈래길에서 마주하는 ‘주고받음의 빛’에 대해 생각해본다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거나 자본의 옷을 입고서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영웅이 없는 시대’란 ‘염원’이라는 주고받음의 수직적 관계를 가능케 했던 ‘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신’이 없는 시대는 ‘신’과의 만남을 가능케 했던 매개체의 상실 또한 가리킨다신이 사라졌다고 할 때 우리는 바로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던 ‘매개’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을 알아채야만 한다바로 ‘동물들’. ‘반려’의 지위로까지 상승한 듯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일 뿐인간과 신을 매개하던 징검돌로서의 동물의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해버렸음을 의미한다매개들의 상실징검돌이 없는 세계. 1대 1의 관계이러한 즉물적이고 쾌락적인 세계로의 침잠은 외려 저 낮은 자리에 있는 동물들의 지위를 박탈해버린 수평적인 관계의 맹신이 초래한 결과이다.







11. ‘그곳에서 나는 그저 수십 마리의 파리를 잡았다.’


자본제적 체계와 동화하는 것을 카멜레온식의 본능으로혹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초식동물의 보호색으로 착각하고 있는 오만과 허영이 일말의 망설임없이부끄러움없이 입법권을 휘두르고 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무엇이 남았는가아니 무엇을 기각(棄却)할 것인가핸드폰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보를 생산하는 데 애쓰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 핸드폰으로 담을 수 없는 정보와 어휘을 생산하고 조형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세속의 어긋남을 어긋냄으로 바꾸는 급진적인 노동일 수 있을까. “몸이 좋은 사람들(동무)”과 어울림으로써 밝힌 길은오로지 ‘걷기’(체계와의 창의적인 불화로서의 ‘산책’)로만 갈 수 있을 것이다걷기란 ‘인내’만도 아니고 ‘방법’인 것만도 아닌데,주고 받음(응하고 답하기)의 수행을 통해 길어올릴 수 있는 한 줄기의 빛이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했기에 한 치 앞도 예감할 수 없는 그 “없던 길”을 지며리 걸어낼 수 있게 말없이 비춰준다그 길 위에서 ‘말’이나 ‘글’보다 애써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은 생활양식임을 깨닫게 된다세속의 틀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일상 속에서 길어올리고 빚어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생활양식을 통해 삶의 의욕과 작은 구원을 길어올리는 순간일 것이다하여나는 좀 더 낮은 곳으로 향할 작정이다스스로를 낮추는 꼴을 벼려갈 것이다그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부디 그 길이 돌아갈 수 없고돌이킬 수 없는 길이기를그 길이 어울림과 앎의 빛을 밝혀주는 길이기를 고대한다.

이 후기는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수십 마리의 파리를 잡았다.’



31회 <독서여행>(2012. 8. 5~9 / 충남 공주와 부여) '개인(귀족)주의의 유산과 미래의 인문주의'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