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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잡담의 급진화 : (1) 인용한다는 것

by 종업원 2013. 1. 26.


언젠가 철학자 김영민 선생님과의 환담 중에 선생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언젠가부터 신경을 써서 지켜 보았는데 김 선생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번도 나쁘게 말하는 경우가 없는 거 같아요.”


김영민 선생님은 나를 ‘이 선생’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둘 사이엔 딱히 친분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이지만 이처럼 과분한 말씀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과 비난, 험담까지 아주 잘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절 너무 좋게 보신 거 같습니다.”


맞다. 나겐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는 ‘원한’이 남아 있어 다른 이들에게 그 원한을 투영하는 경우가 잦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이란 이유만큼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하는 흉물스러운 말도 없으리라.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항상 특권적인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탓에 아마도 여쭤보시는 이들에 대해 좋은 점에 대해 부각시켜 말씀 드린 거 같습니다.”


신기한 것은 바로 그 특권적인 자리에서 ‘그들’에 대해 긍정적인 인용을 하고 나면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그들의 긍정적인 면에 조금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특권적인 자리’란 ‘철학자 김영민’이나 유명하고 대단한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조형하는 상호성에 의해 마련되는 것인 셈이다. 늘 누군가에 대한 험담만을 늘어놓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의 긍정적인 면을 애써 캐내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분명 관계의 외부성은 2자가 아닌 3자가 마련해주는 것이다. 험담은 3자를 절멸하고 2자 관계를 공고히 하며 ‘우리가 남이가’라는 근친적 관계, 자아의 허영을 확장하는 관계, 나르시시즘적 체계를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 3자를 2자적 관계로 손쉽게 끌어들이지 않고(영업 사원과 같은 과잉 긍정) ‘비평’을 통해 3자 관계를 조형하는 일상적 대화를 습관화 하는 것이야말로 ‘생활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근자에 내가 애써 실험하고 있는 ‘잡담의 급진화’ 또한 이러한 층위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3자’가 병들어가는 ‘우리’를 살린다. ‘우리’의 잠재력은 3자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하겠다. 그것을 나는 ‘인용한다는 것’이라는 문맥 위에서 이해해보고 싶다. 이때의 인용이란 내가 읽고 본 것에 대한 과시가 아닌 내가 쓰는 말과 사유가 발현되는 ‘관계’의 출처를 밝히는데 사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활자화 되어 이미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인용(호의)은 넘쳐나지만 정작 자신의 생활과 현장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수많은 관계에 대해서는 한사코 인용하지 않는 병적인 인용의 정치학. 바로 그 병든 인용이 '현장'을 마모시킨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수없이 많은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는 대화. 그 대화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소개 받는다. 대화/잡담이 네트워킹이 되고 만남의 매개가 되는 것. 말하면 말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만나게 되는 그런 대화/잡담. 그렇게 애써 인용함으로써 조형되는 관계들. 일상의 관계를 구원하는 3자라는 작은 등불을 함께 보호하고 살리는 것. 인용한다는 것과 살리는 것, 그리고 함께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