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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에 대한 단상

by '작은숲' 2012. 6. 13.




1.

위암에 걸린 시민과장 와타나베의 x-ray 사진으로 시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生きる, 살다). 암세포가 퍼져 있는 ‘와타나베’의 위를 포착하는 시선은 분명 전쟁 기술의 산물이다. 전후 x-ray는 삶을 투시하는 광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적’을 찾아내서 ‘절멸’시키는 그 기술이 ‘병’을 찾아내어 ‘생(life)’을 연장하고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전후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중 한편인 <이키루>의 표제가 가리키는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x-ray의 변주와 겹친다. 총력전 체제 이후 전쟁이 일상 속에서 준비된다는 것(도미야마 이치로)은 상식이 되었다. 영화는 만년 시민과장 ‘와타나베’에 의해 전후, 산다는 것의 감각이 어떻게 다시 재발견되는지를 성실한 자세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재발견된 삶의 의미가 무엇을 삭제하고 은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냉전(cold war)과 동아시아(regional)라는 프레임을 도입할 때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가 다른 관점으로 독해된다.



2.

이 영화에는 ‘전전’이나 ‘전후’의 문맥이 삭제되어 있지만 전후, 삶의 감각이 무료함이나 제도에 내맡겨버리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이 영화가 제작된 1952년이라는 시기를 '냉전의 시간표'에 대입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대일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주요 안건이 표면적으로는 한반도 독립의 승인, 타이완과 펑후 제도(澎湖諸島),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및 사할린에 대한 권리 포기, 남태평양 제도 및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를 미국에게 위임하는 평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마루카와 데쓰시의 지적처럼 이 조약의 중요한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 중국, 대만 측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냉전문화론><리저널리즘>을 참조). 이른바 열전의 시대를 종식하고 냉전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이 조약의 한켠에서는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전후 복구 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가 열전에 휩싸여 있을 때 이를 관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 속해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열전을 관망하는 독특한 위치에 자리함으로써 전후 복구 체제를 구축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는 이러한 동아시아 냉전의 시간표를 통해 다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3.

아내의 이른 죽음(전전 혹은 전중)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시민과장’의 삶. 삶의 감각이 가족의 문제로 축소되어 있는 듯하지만 이는 전전과 전후의 삶의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전후,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설정 속에 당시의 일본이 ‘열전’ 상태에 돌입했던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과 거리를 두고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전후 복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라는 것과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암’이라는 ‘위기’에 의해 ‘전전’의 ‘삶의 감각’을 다시 복귀 한다는 것, 아니 보다 정확하게 ‘위기’(동아시아의 열전)를 통해 비로소 ‘삶의 감각’을 체득한다는 것은 ‘이키루’(살다)라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열전을 관망하고 있는 ‘자리’를 통해 구축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30년간의 공무원생활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와타나베의 토로 속에서 우리는 ‘전전’의 기억을 ‘전후’에 삭제하는 한 방식과 대면하게 된다. 와타나베가 우연히 만난 소설가를 따라 나선 ‘삶의 현장’은 일본에 침투한 미국문화의 현장과 다르지 않다. 재즈와 스윙이 넘치는 거리, 빠칭고와 bar. 전후 미국문화가 깊숙히 들어온 밤문화의 거리가 바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이 순간부터 살아났어”라는 소설가의 말이 가리키는 지점은 삶에 대해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와타나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이 사람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야”) 발디딜틈 없이 홀을 가득 매운 사람들의 물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에 의해 구성된 시민공원 또한 동아시아의 냉전 시간표를 보조선으로 도입할 때(‘보조선의 도입’은 마루카와 데쓰시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다른 의미를 내장한 공간이 된다. 죽기 전 살아 있음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열을 쏟았던 헌신적인 노동은 곧장 전후 재건의 논리과 겹친다. 영화는 부시장을 위시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한 작태를 비판함으로써 시민공원의 공적을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돌려주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때의 시민공원을 구축한 것은 와타나베가 아니라 열전(hot war) 상태에 놓여 있던 대만과 중국, 남한과 북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가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이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적 관점으로 냉전을 보는 것이며 냉전의 관점으로 동아시아를 보는 것이다.




4.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와타나베는 반복해서 ‘시간이 없어’를 되뇌며 한시도 쉬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시민 공원 조성을 위해 애쓴다.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것에서 일본 특유의 책임/소명 의식의 단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쉼없는 노동을 수행하는 병든 육체를 남김없이 소진하여 시민공원을 조성하는 와타나베의 육신은 '시간이 없어'를 되뇌며 한시도 쉬지 않고 흡사 착륙장치 없어 계속 비행해야 하는 조종사와 같은 다급하고 절망적인 그의 육체를 통해 떠올리게 되는 것이 적지 않다. 살신성인, 혹은 희생양의 당위 논리가 전전과 전후에 형식을 달리하여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타나베의 영전 앞에서 그의 헌신에 대해 격렬하게 증언한 공무원들은 이후부턴 와타나베의 뒤를 이어 살 것을 맹세한다. 이때 이 영화의 제목인 <이키루>의 본래적 용법이 드러난다. 한 명의 헌신적인 노동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통해 애도를 완수하고 그의 뒤를 잇겠다는 논리 속에 일본의 전후 재건이 열전의 동아시아에 빚지고 있음에도 그 문제를 망각하고 개인의 헌신에 대한 애도로 완벽하게 대체되어버린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와타나베에 대한 애도가 동아시아의 열전을 삭제해버린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의 ‘산다는 것’의 감각은 바로 동아시아의 열전을 은폐하고 삭제함으로써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