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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더욱 활발히 회자되고 있는 벤야민의 <역사 개념의 대하여>(1940)는 그가 아득한 국경 앞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만난 아렌트와 하인리히 부부에게 맡긴 원고 뭉치였다. 가까스로 비자를 구한 이 부부는 리스본에서 체류한 3개월동안 벤야민이 건네준 역사 테제들에 관해 열렬하게 토론했다. 벤야민은 자살했지만 그의 원고 뭉치는 남았다. 살아남은 아렌트는 그에게 맡겨진 원고를 읽고 토론했으며 그것에 대해 다시 썼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그 생(生)과 사(死)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한낱 우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맡겨진 원고 뭉치는 남겨진 아렌트에 의해 ‘말 뭉치’가 되어 살아남은 이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벤야민의 글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말’과 ‘글’에서, ‘생활양식’과 ‘희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렌트가 건네받는 원고 뭉치를 소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말(글)로써 (응)답 했기 때문이다. ‘원고’로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그 추상적인 ‘뭉치’에 숨결을 불어넣어 ‘말’의 형태로 풀어내었다. 이 숨결은 정확하게 [건네받은] (원고)뭉치에 ‘응’하는 수행성이다.
거론된 바는 없지만 그 원고 뭉치는 벤야민의 죽음과 등가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살아남게 된 ‘아렌트’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설령 그녀가 벤야민의 죽음을 몰랐다고 해도 ‘절멸의 정치’라는 ‘파시즘’ 체제의 역사적 현장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벤야민으로부터 건네받는 원고 뭉치는 “바로 옆에서 이미 폭력이 행사되고 있음”(도미야마 이치로, {폭력의 예감}, 손지연, 김우자, 송석원 옮김, 그린비, 2009, 27쪽)을 항상 암시하는 증거이자 ‘목소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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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는 그 다음 순간에 공범자가 되어 살해하는 자 쪽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을 회로로 하여 살해당하는 쪽과의 일체화가 늘 존재한다. 혹은 시체 옆에 있는 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살해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 있는 한, 아직 시체는 아니다. 그리고 시체 옆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언어행위의 임계로부터 발견해 내야 할 것은 폭력에 저항할 어떤 절박한 가능성이다. 그것도 말로서 말이다.”_도미야마 이치로, 위의 책, 27쪽.
유대인으로서 공격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 유대인으로서 저항하고 반항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을 기꺼이 떠맡았던 아렌트. 유대인의 옆에서(beside) 의식적 파리아conscious pariah가 되고자 했던 아렌트의 자리는 죽어가는 이의 옆자리였기에 그녀는 시체의 동공에 마지막으로 맺힌 상(像)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정초주의자’, ‘난간 없는 사유(Denken ohne Gelander)’, ‘임시적인 것’, ‘무국적 상태’라는 아렌트 사유의 골격은 “언어행위의 임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토를 가지지 못하고 삶의 토대를 빼앗긴 내몰린 이들, 상징질서를 박탈당한 이들, 다시 말해 ‘말을 빼앗긴 이들’의 옆에서 아렌트는 “언어행위의 임계”에 대해 고심했을 것이다. 옆에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그 ‘옆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기꺼이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은 ‘의지’이자 ‘수행’이며 ‘[응답]책임’이다. 이는 간단히 ‘정치적 올바름’ 따위나 ‘윤리’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정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국적 상태에서의 ‘이동’을 조건으로 하는 ‘삶의 양식’에 다름 아니다. ‘공적인 것’이 조형되는 원리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적인 것도 행위적인 것이다. 끝없는 자발성과 선택에 의해 바꿔나가는 것이 공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 사유는 임시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_k(<시독> 83회, 2012년 6월 30일)
‘언어행위의 임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소박하게나마 “상투어와의 싸움”(k)이라는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을 주고 받지 않는 시대, 말이 말을 삼켜버리는 시대, 말이 가난한 시대를 우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모임(결속)’에는 ‘가난’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더 많이 가지기 위해, 끝없이 가지기 위해 ‘가난’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 어두운 시대’이기에 결속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또 계속되어야 한다. 기꺼이 서로의 옆자리에 있었던 우리들의 망막에 맺힌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모습으로 상태의 망막에 맺혔던가? 다시 말해 어떤 말을 주고 받았던가? 아니 우리의 옆에 있던 이들은 누구였는가. 선생이었나, 신이었나? 아니면 선배였나, 동료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웃이었나, 괴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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