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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김기덕의 '식탁'

by '작은숲' 2012. 9. 20.




  <아리랑>(김기덕, 2011)이 김기덕에 '의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김기덕을 '위한'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모놀로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김기덕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출구없는 상황에서 어떤 '길'을 내려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것을 <'의욕'을 촉발하여 잃어버린 '뜻'을 찾아 '다시 시작'하기 위함>이라는 틀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자신과의 대화는 자문자답의 형태를 띄고 있을 수밖에 없기에 고백을 반복하거나(자기 감정에 도취) 나르시시즘의 골짜기로 빠지기 쉬운 형식인 것은 분명하나 '카메라'의 개입으로 '나-너'라는 이자관계, 고백관계, 나르시시즘적 관계가 아닌 삼자 관계의 조건이 마련된다. <아리랑>은 차라리 '자기와의 결별'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각주:1] 극중에서 김기덕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기에 '자신'을 '영화의 조건'으로 삼아 '영화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는[각주:2] 그 애씀은 골방에서 "하나의 세계" 를 만드는 문학의 형식과는 상이하며 골방에서 우물을 파는("숟가락 하나로 만든 샘") 자립형 음악가의 작업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김기덕이 canon 5D markⅡ라는 비교적 보편화된(비전문가적인 혹은 '숟가락'에 가까운) 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덕의 '씻김굿'은 단지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한 한 비주류 영화 감독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단채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김기덕의 의한 것은 분명하지만 김기덕을 '위한' 영화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리랑> 속에는 김기덕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내용과 장치들이 잠복해 있으며 김기덕은 늘 그래왔듯이 자신이 하던대로 '영화'를 만든다. '웰메이드'라는 프레임이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는 최대치의 범주로 설정하고 있는 한국의 환경 속에서 우리는 김기덕이 '영화'를 만드는 제작 현장에 초대됨으로써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영화 세계(작가주의)뿐만 아니라 기왕의 '영화'라는 매체와는 상이한 '영화'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홀로 만든 투박하고 어설픈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도 넘볼 수 없는 무게감을 가지는 것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막다른 시공간에서 절망의 잔해들을 끌어모아 '매듭'을 만드려는 그의 고투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며 단칼에 모든 것이 결정나는 무사식의 결기어린 단호함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기덕이 살고 있는 산 속의 외딴집이야말로 김기덕식 '세트장'이고 부족하기만 한 세간살이가 '미술'이며 '미장센'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김기덕이 찍고 있는 것은 '다큐'이기도 하고 '기록'이기도 하며 '영화'이기도 하다. 그간 '웰메이드'(가령, '잘 만들어진 항아리'와 같은)라는 단채널적인 관점이 독점해온 '영화'라는 매체의 범주(가능성)는 김기덕이 살고 있는 산속 외딴집의 좁은 텐트 속에서 다른 자리를 갖게 되는 셈이다. <아리랑>은 김기덕이(라는 배우 혹은 피사체의먹고, 자고, 싸고, 말하고, 보는 것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소(material)'들을 조합(편집)하는 것이 김기덕 영화의 요체라 하겠다. 김기덕이 만들었던 많은 영화들이 단순해보이는 이분법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 또한 그가 줄곳 근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그것이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질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한 장면'에 집중해보자. 바로 그가 자신을 찍으며 밥을 먹고 있는 장면 말이다. 그가 숟가락(카메라)을 들고 먹을(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식탁(셋트-촬영장)이다. 식탁엔 밥과 한 가지의 반찬만이 있고 그 누구보다(김기덕의 먹는 연기는 과히 배우 하정우의 그것보다 뛰어나다!) ()있게 먹()는다. 그의 식사는 '일찬일식'이라는 간명한 단어로 충분히 설명된다. 밥의 상태와 반찬의 면면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김이 나는 더운 밥이 있고(심지어 그는 <오뚜기 씻어놓은 쌀>을 쓰기에 더운 밥을 내는 절차 또한 간소화되어 있다!) 함께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있으니 식사의 조건은 그것으로 족하다이제 먹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나는 간명한 그 식탁에서 그가 만들었던 영화들을 보게된다. '일식일찬'으로만으로 성립되는 식탁-영화. 그 식탁-영화는 투박하고 간명하지만 훌륭하다. 문제는 우리들의 '미각'이 그의 '일찬일식 영화''씹고-즐기고-맛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의 영화는 단 하나의 진실에만 집중한다. 밥과 반찬, 일찬일식,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김기덕의 식탁' 위에서 그가 마련한 원재료들을 맛있게 먹을 것인가, 지나치게 단순하여 무례해보이기까지 한('김기덕 영화는 폭력적이다'라는 폭력적인 규정!) 그 식탁을 향해 발길질할 것인가.     


  



  1. 1.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조해보자. "아무리 '타인의 시점'에 서려고 해도 거울에 의한 반성에는 공범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자기 좋을 대로만 본다. (중략) 사진에는 그것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객관성'이 존재한다. (중략)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진을 보고 느낀 '강한 시차'이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2005, 28-29쪽) 나는 김기덕의 <아리랑>이 취하고 있는 형식에서 "내성에 머무르면서 동시에 내성이 갖는 공범성을 파괴하려"(29쪽)는 고투를 읽어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김기덕의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사진을 보고 느낀 '강한 시차'에 의해 도입되는 객관성(타자성)을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도입할 수 있게 될런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2. 2. 김기덕의 영화가 단 한번이라도 이러한 조건을 벗어났던 적이 있는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