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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아직 정치가 아닌, 구조적인 쾌락 : 영화 <광해> 단상

by 종업원 2012. 10. 5.

2012 / 9 / 16




영화<광해>(추창민,  2012)를 보면서 도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왕이 된 광대를 보면서 ‘안철수’를 떠올리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광해>와 ‘안철수’를 연결시키는 것은 통찰의 성과라기보다 체계화되어 있는 구조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다문화’나 ‘관용’이라는 용어만큼이나 오염된지 오래이고 이는 중도 좌파 따위의 리버럴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진보’와 ‘좌파’를 독과점하고 있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영화 <광해>를 보며 ‘광대’가 행하는 ‘정치’에 감동한다는 것은 이명박 시대에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문재인에게서 다시 희망을 발견함으로써 이명박에 열광했던 과거를 은폐하려는 것과 유사하다아니 차라리 이명박과 노무현(문재인)의 자리에 안철수를 놓아둠으로써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완벽하게 다시 과거(응답하라 2002[노무현],혹은 2007[이명박])를 반복하려는 욕망과 유사하다.


왕이 된 광대가 행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는 아직 정치가 아니다그 행위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은 실상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정치’가 아닌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만을 남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의미라는 것이다왕이 된 광대가‘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조건이란 그를 향해 ‘허균’이 반복해서 외쳤던 ‘정치가 아닌[네놈이 행한 그런 게 정치가 아니다!]’방식으로 남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순간적인 권력(쾌락)에 있다. 그는 단지 룰(rule)을 어겼을 뿐 룰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보름 간 광대가 행했던 행적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치의 방식을 계시 받을 수 있는가왕이 된 광대가 행한 그 정치적으로 올바른 연기는 <왕의남자>(이준익,2005)의 사당패가 목숨을 걸고 한바탕 뛴 그 줄타기 곡예[목숨을건 도약!]만큼도 되지 못한다그는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디론가 멀리 도망쳐버리고 ‘광해’는 곧 폐위할 뿐이다그러니 웅장한 음악과 함께 막을 내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가리키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일 테다황홀할 정도로 빛나는 저 너머의 수평선으로 왕이었던 ‘광대’를 떠나보내는 ‘허균’의 예를 갖춘 인사야말로 구조적인 쾌락을 반복할 수 있는 ‘장치’라는 것대지의 법은 왕 노릇을 했던 ‘광대’를 저 너머로낭만적으로도덕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삭제해버리고 더욱 강력한 방식으로 군림한다는 것!


광대’가 행한 것이 ‘아직 정치 아닌’ 룰을 어긴 도발이었던 것처럼 ‘안철수’로는 아직 ‘정치’가 아니다안철수는 기업가 이명박을 뽑았던 과거의 반복일 뿐이며(혹은 유한킴벌리 사장이었던 문국현에게서 희망을 보려했던)  문재인 또한 이명박을 뽑았던 과오를 망각할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지금 이 땅에 필요한 이는 룰을 정비하고 바람직한 방식으로 교정하는정치적으로 올바른 이가 아닌 룰을 바꿀 수 있는구조적인 형태로 반복되는 신자유주의적 쾌락의 고리에 철퇴를 내려칠수 있는 힘을 가진 이다. 그 힘은 특정 세력이 독과점 하는 권력이 아니라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현상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각주:1] '현상의 잠재적 성격'을 가리킨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힘(권력)으로 가장 먼저 자본제적 체제와 기꺼이 싸울 것이다. 


  1. 1.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태정호/이진우 옮김, 한길사, 1996), 26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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