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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25

시를 함께 읽는다는 것-환대와 초대 2014. 4. 5 사람들로 붐비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누군가를 마중나가는 것. 저는 ‘시를 읽는 것’이 꼭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인’을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웃는 것,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으로서의 시 읽기. 누군가를 먼저 알아본다는 것을 ‘최소한의 환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시 읽기를 통해 ‘문학적 환대’라는 자리로 어렵사리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문학적 환대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환한 미소로 손을 내미는 것은 상대를 향해 불을 비추는 것입니다. 아니 상대가 비추고 있는 불빛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장소를 함께 환하게 불 밝히는 일. 어쩌면 ‘내가 당신을 먼저 알아봤다는 것’은 ‘환.. 2014. 4. 5.
별 수 없기에 경이로운, 어떤 힘들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獨居)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박준, 「2 : 8-청파동 2」 전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 2013. 9. 16.
사무라이들(2) 2013. 7. 31 야마다 요지(山田洋次)의 사무라이 3부작 중 한 편인 (隱し劍 鬼の爪, 2004)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한 장면, 아니 한 순간. 행정관료가 되어버린 사무라이(키타기리 무네조)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검술을 배웠던 옛동료(야이치로 하자마)와 불가피하게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네조는 '말'로 하자마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는 오직 '칼'로서 답하려고 한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력(말)에 이용 당해 추방된 이를 말로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 헌데 이 둘의 대결은 침해당한다. '칼'의 대결 사이에 '총'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정당한 대결의 불가능함. 신식군 훈련을 받은 병사가 쏜 총에 칼을 쥔 하자마의 손목이 날아가는 순간! 그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 2013. 7. 31.
사무라이들(1) 2013. 7. 28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Samurai Rebellion, 1967)을 보다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던 하나의 쇼트.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던 칼이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 자리에 사무라이의 단호한 표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날카로운 칼날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사무라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내는데(아마도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줌-인 한 것이지 않을까) , 칼에서 태어난 사무라이는 칼과 한몸인 것. 헌데 칼-사무라이가 베는 것은 한갓 지푸라기 더미일 따름이다. 칼을 잡은 사무라이가 해야 하는 일은 영주가 쓸 칼의 성능을 확인하는 것이었던 셈.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가 내뱉는 사사하라 이사부로(미후네 도시로)의 말 : "평생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 영주.. 2013. 7. 28.
부사적인 것(1) 별점과 별자리 ‘별점’으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상황이 올까? 이 물음은 ‘별점 평가’를 반대하거나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학 작품 옆에 별점 평가라는 ‘비문학적인’ 형식의 도입을 통해 어떤 문제의식을 길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별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대중음악과 영화를 떠올려본다면 문학에 별점 평가를 도입할 때 초래될 상황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다. 문학의 세속화 혹은 상품화. 숱한 음악/영화 잡지들이 줄줄이 폐간을 하게 된 이유를 별점 평가에서부터 찾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그럼에도 별점 평가가 ‘작품’과 ‘상품’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는 점, 그것이 ‘비평의 자리’를 ‘정보의 자리’로 대체해버렸다는 점, 그리하여 잡지의 역할이 담론 생산이 아닌 트렌드를 점검하고 또 발빠르게 쫓는 것으로 .. 2013. 6. 13.
잡담의 급진화 : (1) 인용한다는 것 언젠가 철학자 김영민 선생님과의 환담 중에 선생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언젠가부터 신경을 써서 지켜 보았는데 김 선생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번도 나쁘게 말하는 경우가 없는 거 같아요.” 김영민 선생님은 나를 ‘이 선생’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둘 사이엔 딱히 친분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이지만 이처럼 과분한 말씀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과 비난, 험담까지 아주 잘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절 너무 좋게 보신 거 같습니다.” 맞다. 나겐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는 ‘원한’이 남아 있어 다른 이들에게 그 원한을 투영하는 경우가 잦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이란 이유만큼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하는 흉물스러운 말도 없으리라. 이어 이런 말을.. 2013. 1. 26.
‘그곳’의 유산과 미래의 생활정치 2012. 8. 13 1. 다시, 생활정치로 아마도 꿈을 꿨던 것 같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 지인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며 지난 밤의 꿈을 헤집어 봤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누운 상태로 전화를 받다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꼼지락거려본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그러다 별안간 허리를 곧추세워 바른 자세로 앉는다. 20분 간 통화에‘만’ 집중해본다. 멀티태스킹이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외려 퇴화에 가깝다고 한 말에(한병철) ‘응’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 해도 무관한 일상적인 행위에 나름의 형식을 부여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작은 의미를 조형해보기 위해서이다. 무용한 원칙을 세워 그것을 근기 있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자본제적 체계 속에서 나름의 버릇과 습관을 벼려가는, 생활정치의 수행방식.. 2013. 1. 21.
‘말’과 ‘행위’로 짜는 “천 하루의 퀼트” : 작은 공동체에 관하여 한 철학자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는 이 강연문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연구 주제 및 대상을 ‘연구’라는 영역에 가둬두지 않고 매번 삶의 현장을 불러내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의 말’과 ‘현실의 말’, ‘연구의 말’과 ‘현장의 말’은 분명 하나의 언어 체계 아래에 있는 것이겠지만 이 말들은 서로 교통/교환되지 못하고 각각의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영역을 강고히 하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체계 아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교통/교환되지 않으니 서로에겐 차라리 외국어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겝니다. ‘이방의 말’을 듣는 것이 ‘이방의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회통이나 소통이라는 .. 2013. 1. 15.
‘둥근' 말의 역사 ‘이곳이 불타고 있어요’ 분명 ‘그곳’은 불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자신이 자신을 태워 자꾸만 위로 ‘비상’하려는 불꽃이 있는가 하면 활활 타오르지는 않지만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장작더미 아래의 ‘남은 불씨’로 내내 타는 불도 있었다. 불과 불이 서로 엉겨 붙어 이내 꺼져버리기도 했고 불을 끄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함께 타버리기도 했다. 때론 함께 타올랐고 때론 홀로 타들어갔다. 말이 있었고 쉼없이 그 말들을 주고 받는 응(應)하기가 행해졌으므로 그곳에서는 ‘먼지조차 타서 불길이 되곤’ 했다. 타오르는 말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지만 그 말이 언제라도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灰)가 남았(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재 위로 다시 불을 찾기 위해 들어선 장작들.. 2012. 10. 18.
인용한다는 것 : "비상에서 보행으로"(1/계속) "철학 선생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혹자는 내가 데카르트나 칸트에 대해 서술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논문에는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의 사고와 닮은 외국인을 찾아서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책은 영어로 나와 있어서, 외국에서 작업할 경우에는 내 이름을 인용하는 편이 오히려 편할 것입니다. 일본인으로 서양의 것을 하면서 서양흉내만 낸다면 부끄럽지요. 그러나 연구대상은 외국인이라고 해도 결국 일본의 입장만 생각하고 있지요. 예나 지금이나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는데,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_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6), 182쪽 2012.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