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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29

10대라는 비평 2014. 12. 28 / 2015. 12. 20 작년 이맘 때쯤 생활예술모임 의 송년회가 송도 집에서 열렸고 그날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집을 가득채웠다. ‘이내’와 ‘곡두’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1층 서재에서 잠깐 서영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 몇번 참여했고 에서 또 몇번 만나 안면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 이야기를 듣곤 가끔 걱정스레 떠올린 것말고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는데 이날 지갑에 가득한 영화표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해동안 본 영화에 대한 짧은 촌평이 이어졌던 것이다. 재미 있었다거나 재미 없었다라는 간명한 규정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좋았던 영화였다라는 식의 솔직하면서도 진중한 감상평이 무르익어가면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한 짧은 소회를 그야말로 핵심적.. 2015. 12. 25.
무명의 삶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삶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보인바 없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평범한 소설’(『스토너』)을 덮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커다란 질문을 관통시킬 수 있는 답변을 해낼만한 능력은 없지만 그럼에도 응답해야 한다면 ‘작은 기쁨’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 소박한 어휘 조각은 곧잘 삶의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다소 긴급하게 부정적인 문맥으로 말하고 싶다. ‘작은 기쁨’은 ‘소박한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욕망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작은 것을 요구한다는 욕망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욕망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거나 평범과 보통의 세계를 보살피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들.. 2015. 12. 18.
유나의 '체질'(<유나의 거리>-①) 2014. 10. 29 "엄마, 전 제가 어딜가든 저랑 친했던 언니, 동생들, 버리고 갈 순 없어요. 전 그 사람들이랑 어울려 사는 게 제 체질에 맞고 좋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 46회(임태우 연출, 김운경 각본, JTBC, 2014) 46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엄마를 만난 후 유나의 삶은 급격히 변한다. 한번도 가져본적 없던 아파트와 자동차, 헬스 회원권은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간 함께 어울렸던 동료들, 이웃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댓가를 요구한다. 유나가 흔들렸던 것은 갈망했지만 가져보지 못한 엄마의 품과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유나는 부모없이 홀로 고생했던 시간을 보상 받길 원하거나 그런 원한의 감정을 볼모로 삼아.. 2014. 10. 29.
도움닫기 : '함께'라는 이중의 서명 2014. 10. 21/26 도움닫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발구름판을 힘차게 딛고 뛰어오르는 일이다. 그것은 고독(孤獨)하고 독아(獨我)적으로 보이는 공부라는 행위 속에 다른 이들의 손과 발로 일구어낸 노동이 전제되어 있음을 매순간 감각하고 그것을 각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꿔 말한다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홀로가 아니라는 증표이며 나아가 홀로이지 않겠다는 선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부란 결국 도움닫기다. 누군가가 마련해둔 발구름판을 힘차게 딛고 도약한다는 것. 그 도약의 속도와 거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물리적인 수치의 우열보다 도약을 통한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모든 고유한 표현은 도약을 발판으로 하고 있으며 그 도약을 가능케 하는 발구름판은 다른 이들의.. 2014. 10. 26.
시를 함께 읽는다는 것-환대와 초대 2014. 4. 5 사람들로 붐비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누군가를 마중나가는 것. 저는 ‘시를 읽는 것’이 꼭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인’을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웃는 것,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으로서의 시 읽기. 누군가를 먼저 알아본다는 것을 ‘최소한의 환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시 읽기를 통해 ‘문학적 환대’라는 자리로 어렵사리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문학적 환대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환한 미소로 손을 내미는 것은 상대를 향해 불을 비추는 것입니다. 아니 상대가 비추고 있는 불빛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장소를 함께 환하게 불 밝히는 일. 어쩌면 ‘내가 당신을 먼저 알아봤다는 것’은 ‘환.. 2014. 4. 5.
별 수 없기에 경이로운, 어떤 힘들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獨居)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박준, 「2 : 8-청파동 2」 전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 2013. 9. 16.
사무라이들(2) 2013. 7. 31 야마다 요지(山田洋次)의 사무라이 3부작 중 한 편인 (隱し劍 鬼の爪, 2004)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한 장면, 아니 한 순간. 행정관료가 되어버린 사무라이(키타기리 무네조)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검술을 배웠던 옛동료(야이치로 하자마)와 불가피하게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무네조는 '말'로 하자마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는 오직 '칼'로서 답하려고 한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력(말)에 이용 당해 추방된 이를 말로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 헌데 이 둘의 대결은 침해당한다. '칼'의 대결 사이에 '총'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정당한 대결의 불가능함. 신식군 훈련을 받은 병사가 쏜 총에 칼을 쥔 하자마의 손목이 날아가는 순간! 그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 2013. 7. 31.
사무라이들(1) 2013. 7. 28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Samurai Rebellion, 1967)을 보다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던 하나의 쇼트.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던 칼이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 자리에 사무라이의 단호한 표정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날카로운 칼날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사무라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내는데(아마도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줌-인 한 것이지 않을까) , 칼에서 태어난 사무라이는 칼과 한몸인 것. 헌데 칼-사무라이가 베는 것은 한갓 지푸라기 더미일 따름이다. 칼을 잡은 사무라이가 해야 하는 일은 영주가 쓸 칼의 성능을 확인하는 것이었던 셈.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가 내뱉는 사사하라 이사부로(미후네 도시로)의 말 : "평생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 영주.. 2013. 7. 28.
부사적인 것(1) 별점과 별자리 ‘별점’으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상황이 올까? 이 물음은 ‘별점 평가’를 반대하거나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학 작품 옆에 별점 평가라는 ‘비문학적인’ 형식의 도입을 통해 어떤 문제의식을 길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별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대중음악과 영화를 떠올려본다면 문학에 별점 평가를 도입할 때 초래될 상황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다. 문학의 세속화 혹은 상품화. 숱한 음악/영화 잡지들이 줄줄이 폐간을 하게 된 이유를 별점 평가에서부터 찾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그럼에도 별점 평가가 ‘작품’과 ‘상품’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는 점, 그것이 ‘비평의 자리’를 ‘정보의 자리’로 대체해버렸다는 점, 그리하여 잡지의 역할이 담론 생산이 아닌 트렌드를 점검하고 또 발빠르게 쫓는 것으로 .. 2013. 6. 13.
잡담의 급진화 : (1) 인용한다는 것 언젠가 철학자 김영민 선생님과의 환담 중에 선생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언젠가부터 신경을 써서 지켜 보았는데 김 선생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번도 나쁘게 말하는 경우가 없는 거 같아요.” 김영민 선생님은 나를 ‘이 선생’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둘 사이엔 딱히 친분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이지만 이처럼 과분한 말씀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과 비난, 험담까지 아주 잘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절 너무 좋게 보신 거 같습니다.” 맞다. 나겐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는 ‘원한’이 남아 있어 다른 이들에게 그 원한을 투영하는 경우가 잦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이란 이유만큼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하는 흉물스러운 말도 없으리라. 이어 이런 말을.. 2013.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