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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29

‘그곳’의 유산과 미래의 생활정치 2012. 8. 13 1. 다시, 생활정치로 아마도 꿈을 꿨던 것 같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 지인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며 지난 밤의 꿈을 헤집어 봤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누운 상태로 전화를 받다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꼼지락거려본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그러다 별안간 허리를 곧추세워 바른 자세로 앉는다. 20분 간 통화에‘만’ 집중해본다. 멀티태스킹이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외려 퇴화에 가깝다고 한 말에(한병철) ‘응’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 해도 무관한 일상적인 행위에 나름의 형식을 부여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작은 의미를 조형해보기 위해서이다. 무용한 원칙을 세워 그것을 근기 있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자본제적 체계 속에서 나름의 버릇과 습관을 벼려가는, 생활정치의 수행방식.. 2013. 1. 21.
‘말’과 ‘행위’로 짜는 “천 하루의 퀼트” : 작은 공동체에 관하여 한 철학자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하는 이 강연문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연구 주제 및 대상을 ‘연구’라는 영역에 가둬두지 않고 매번 삶의 현장을 불러내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의 말’과 ‘현실의 말’, ‘연구의 말’과 ‘현장의 말’은 분명 하나의 언어 체계 아래에 있는 것이겠지만 이 말들은 서로 교통/교환되지 못하고 각각의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영역을 강고히 하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체계 아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교통/교환되지 않으니 서로에겐 차라리 외국어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겝니다. ‘이방의 말’을 듣는 것이 ‘이방의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회통이나 소통이라는 .. 2013. 1. 15.
‘둥근' 말의 역사 ‘이곳이 불타고 있어요’ 분명 ‘그곳’은 불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자신이 자신을 태워 자꾸만 위로 ‘비상’하려는 불꽃이 있는가 하면 활활 타오르지는 않지만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장작더미 아래의 ‘남은 불씨’로 내내 타는 불도 있었다. 불과 불이 서로 엉겨 붙어 이내 꺼져버리기도 했고 불을 끄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함께 타버리기도 했다. 때론 함께 타올랐고 때론 홀로 타들어갔다. 말이 있었고 쉼없이 그 말들을 주고 받는 응(應)하기가 행해졌으므로 그곳에서는 ‘먼지조차 타서 불길이 되곤’ 했다. 타오르는 말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지만 그 말이 언제라도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灰)가 남았(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재 위로 다시 불을 찾기 위해 들어선 장작들.. 2012. 10. 18.
인용한다는 것 : "비상에서 보행으로"(1/계속) "철학 선생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혹자는 내가 데카르트나 칸트에 대해 서술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논문에는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의 사고와 닮은 외국인을 찾아서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책은 영어로 나와 있어서, 외국에서 작업할 경우에는 내 이름을 인용하는 편이 오히려 편할 것입니다. 일본인으로 서양의 것을 하면서 서양흉내만 낸다면 부끄럽지요. 그러나 연구대상은 외국인이라고 해도 결국 일본의 입장만 생각하고 있지요. 예나 지금이나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는데,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_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6), 182쪽 2012. 10. 5.
아직 정치가 아닌, 구조적인 쾌락 : 영화 <광해> 단상 2012 / 9 / 16 영화(추창민, 2012)를 보면서 도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왕이 된 광대를 보면서 ‘안철수’를 떠올리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와 ‘안철수’를 연결시키는 것은 통찰의 성과라기보다 체계화되어 있는 구조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다문화’나 ‘관용’이라는 용어만큼이나 오염된지 오래이고 이는 중도 좌파 따위의 리버럴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진보’와 ‘좌파’를 독과점하고 있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 영화 를 보며 ‘광대’가 행하는 ‘정치’에 감동한다는 것은 이명박 시대에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문재인에게서 다시 희망을 발견함으로써 이명박에 열광했던 과거를 은폐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아니 차라리 이명박과 노무현.. 2012. 10. 5.
김기덕의 '식탁' (김기덕, 2011)이 김기덕에 '의한'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김기덕을 '위한'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모놀로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김기덕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출구없는 상황에서 어떤 '길'을 내려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것을 이라는 틀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자신과의 대화는 자문자답의 형태를 띄고 있을 수밖에 없기에 고백을 반복하거나(자기 감정에 도취) 나르시시즘의 골짜기로 빠지기 쉬운 형식인 것은 분명하나 '카메라'의 개입으로 '나-너'라는 이자관계, 고백관계, 나르시시즘적 관계가 아닌 삼자 관계의 조건이 마련된다. 은 차라리 '자기와의 결별'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극중에서 김기덕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기에 '자신'을 '영화의 조건'으로.. 2012. 9. 20.
말, 부딪힘의 섬광 매끄러운 표면(face)을 따라 자연스레 엮어지는 관계. 동의와 긍정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근자에 우리들의 결속을 가능케 하는 유용한 네트워크인 페이스 북(facebook)의 세계. ‘좋아요’라는 ‘과잉 긍정’의 주고 받음이 ‘친구’이거나 ‘알 수도 있는 친구’라는 유례가 없는 매끄러운 관계망을 구축한다.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지 않고 누르는 ‘좋아요’가 만드는 ‘호의의 프레임’ 속에서 만나는 우리는, ‘좋아요’가 ‘오해’를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이해’의 지평을 독점하고 있는 한 영영 서로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무료’라는 자본제의 호의에 의해 관계양식과 소통 방식을 독점하고 있는 ‘카톡’의 세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카톡’은 Social이 아닌 privacy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처럼 .. 2012. 7. 24.
건네받은 (말)원고 뭉치 근자에 더욱 활발히 회자되고 있는 벤야민의 (1940)는 그가 아득한 국경 앞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만난 아렌트와 하인리히 부부에게 맡긴 원고 뭉치였다. 가까스로 비자를 구한 이 부부는 리스본에서 체류한 3개월동안 벤야민이 건네준 역사 테제들에 관해 열렬하게 토론했다. 벤야민은 자살했지만 그의 원고 뭉치는 남았다. 살아남은 아렌트는 그에게 맡겨진 원고를 읽고 토론했으며 그것에 대해 다시 썼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그 생(生)과 사(死)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한낱 우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맡겨진 원고 뭉치는 남겨진 아렌트에 의해 ‘말 뭉치’가 되어 살아남은 이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벤야민의 글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말’과 ‘글’에서, ‘생활양식’과 ‘희망’에서 발견할.. 2012. 7. 17.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에 대한 단상 1. 위암에 걸린 시민과장 와타나베의 x-ray 사진으로 시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生きる, 살다). 암세포가 퍼져 있는 ‘와타나베’의 위를 포착하는 시선은 분명 전쟁 기술의 산물이다. 전후 x-ray는 삶을 투시하는 광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적’을 찾아내서 ‘절멸’시키는 그 기술이 ‘병’을 찾아내어 ‘생(life)’을 연장하고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전후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중 한편인 의 표제가 가리키는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x-ray의 변주와 겹친다. 총력전 체제 이후 전쟁이 일상 속에서 준비된다는 것(도미야마 이치로)은 상식이 되었다. 영화는 만년 시민과장 ‘와타나베’에 의해 전후, 산다는 것의 감각이 어떻게 다시 재발견되는지를 성실한 자.. 2012.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