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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긴머리 노란 청년

by 종업원 2010. 4. 14.


  몇 권의 책이 배달되어 왔다. 
단 한순간도 기다린 적이 없고, 온다는 사실 조차 잊고 있었던 것들. 갑작스레 떨어진 체감 온도에 '꽃들은 어쩌나'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린 것처럼, 오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억하겠지만 것이지만, 뒤늦음이라는 회한에 휩쓸려버릴 그런 기다림들, 단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지만 기꺼이 찾아오는 그런 것들.

  책을 배달하는 분이 바뀌었는데, 아마도 알라딘에서 택배회사를 바꾸었던지(배송일이 늦다는 불편사항을 알라딘에 접수시킨 적이 있다), 택배 기사님이 교체된 모양이다. 모든 기사님들이 마치 인사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무뚝뚝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전해주고 가던 그 택배 기사님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택배 기사님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긴머리 청년이었는데, 2초정도만 그를 마주했지만 나는 그가 택배일에 익숙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인사를 세번이나 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으며, 내가 있는 연구실은 1층인대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인사를 세번이나 했다. 이제 막 기사님이 되려는 것이다. 나도 인사를 한번 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는 떠난 후였다. 긴머리 노란 청년은 내게 인사를 전해주고 떠났다.

  거친 호흡은 입술을 부르트게 한다. 일이 손에 익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야만 할 때, 호흡은 거칠어진다. 2003년 겨울이 내겐 그런 시간이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운전과 배달을 독촉하는 전화에 입술과 손등은 늘 부트터 있었고 자주 피가 맺히기도 했다. 물건을 배달하는 작은 봉고차에서 나는 처음으로 FM 92.7 방송을 알게 되었고 그때 들었던 여러 음악들이 큰 힘이 되었다. 긴머리 노란 청년의 트럭에도 92.7과 같은 것이 있을까. 크게 노래를 따라부르며 인사를 배달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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