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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노동10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들의 우아함_켄 로치, <케스 Kes>(1969) 2020. 4. 21 지난주는 강의 동영상을 (못)만드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원고 마감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동영상 강좌 제작을 자꾸만 미루고 싶은 이유는 '일목요연하게 요점(만)을 잘 전달하는 제작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테고, 그런 제작술을 거부하고 싶은 저항과 차마 저항할 수 없는 형편이 충돌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수업 업로드'는 미룰 수도 없는 일이라 4주차를 기점으로 수업 영상 촬영을 밤을 꼬박 새운 아침에 하는 경우가 잦다. 파탄난 생활 리듬. 일요일에 강의 영상을 하나 올리고 간만에 '밤'에 취침을 했다. 새벽에 깨어 관람한 켄 로치의 (1969). 거의 모든 장면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였다. 영화라는 매체의 경이로움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 2020. 5. 5.
영화가 건넨 선물Cinematic Present(1) 뒤돌아본 얼굴 ⓒ (최아름, 2012) 학창 시절 내내 '완무'(조현철 분)의 뒷모습만 봐야 했던 '영아'(김고은 분)를 뒤돌아보는 장면. 완무는 어쩌면 저 순간 처음으로 영아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른다. 감정적인 동요를 금지하고 있는 듯한 덤덤한 정조로 흐르는 를 거듭 관람하다보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이성복)조차 낼 수 없는 슬픔의 정서가 곳곳에 배어 있음을 알게 된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미안함 앞에서 최아름은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채 (그런 이유로 충분하지 못한) 미안함을 전하지만 채울 수 없는 관계의 빈자리에 영아조차 모르는 (영화) 선물을 놓아둔다. '거기가 니 자리야?'라고 물으며 돌아보는 완무의 얼굴 또한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영아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다. 2018. 7. 14.
덩치 큰 사람의 괴상한 걸음걸이―<레이디 버드 Lady Bird>(그레타 거윅, 2017) 노아 바움벡의 (Frances Ha, 2012)에서 가난하지만 무모하고, 부지런해야 할 상황에도 게으르며 그럼에도 당당해보이는 그레타 거윅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은 거의 없어보인다. 20세기 말에 접했던 누벨바그 계열의 영화에 매료되었을 땐 나를 매혹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에 더욱 맹목적이었지만 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하나하나 만져지는 것처럼 생생한 감각으로 전해졌기에 영화 전체가 하나의 장면이 되어 '잊을 수 없는 것'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적인 배경을 뒤로 한 채 커다란 개와 함께 산책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노아바움백, 2010)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레타 거윅 특유의 괴상한 걸음걸이를 좋아한다. 그이가 만든 첫 번째 영화가 개봉 했다. 2018. 4. 15.
얼굴을 가린 오열-<립반윙클의 신부>(이와이 슌지, 2016) (A Bride for Rip Van Winkle 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2016) "이렇게 남앞에서 홀딱 벗으니 역시 수치스럽구만." "엄청 부끄럽네요, 어머님." 2017. 12. 29.
물 한 잔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 ‘유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미선’의 집에 얹혀 살며 가게 일을 돕고 있지만 본업은 따로 있다. 전설적인 소매치기 ‘강복천’이 유나의 아버지였고 이름값에 걸맞게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기에 유년 시절부터 홀로 커야 했던 유나 또한 살아가기 위해선 소매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김운경 극본, JTBC, 2014)는 매회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놀라웠던 것은 등장인물들이 물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이었다. 돈 많은 유부남과의 전략적 교제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온 미선이 제 손으로 하는 거라곤 패션 잡지를 보는 것이나 휴대폰으로 고스톱 게임을 하는 것 정도인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 한 잔을 달라고 유나에게 부탁 한다. 미선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유나에게 컵을 .. 2017. 11. 1.
불이 켜져도, 불이 꺼져도―<흐트러지다 乱れる>(1964) 2017. 10. 10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의 (1964)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두 장면. 영화 초반, 카메라는 전쟁으로 불 타버린 집터에 기둥을 세우고 17년 동안 남편도 없이(결혼하고 반년만에 필리핀에서 전쟁으로 사망) 시집살이를 해오며 가게(동시에 가계)를 꾸려온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의 불꺼진 부엌을 비춘다. 바깥에서 새어들어온 불빛으로 대충의 윤곽을 드러내는 설정이지만 나루세는 그런 정황은 살리되 마치 17세기 회화처럼 음영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주방의 면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담아낸다. 부엌에 불이켜지자 정갈하고 빈틈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건 영화 내내 카메라가 비추던 가게 내부에 도열해 있는 술병들과 식료품만큼 체계적이진 않지만 17년(다시.. 2017. 10. 11.
내 옆을 지나가는 전령 구로사와 아키라의 (1980)의 초반 시퀀스 중의 한 컷. 급히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수많은 병사들이 널부러져 있는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전령에 의해 널부러져 있던 병사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세계와 사람들을 깨우는 움직임이 있다. 내게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일으켜 세우는 소식이 있다. 누군가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의도 없이 그 앞을 바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욕심 없이 깨어난다. 2017. 9. 16.
허리숙여 절하는 이유 2017. 6.20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의 1952년작 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은화일지도 몰라 바닥에 떨어진 병뚜껑을 줍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딸로부터 왜 나를 낳았냐고, 왜 여러 남자와 결혼을 했냐고 따지는 말에 너희들을 키우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었었다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너마저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냐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한 뒤, 어머니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찐빵을 챙겨가도 되겠냐고 딸에게 되묻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혹여나 은화일까 싶어 어머니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집어올린다. 기대와 달리 은화가 아니라 병뚜껑이다. 손바닥에 쥐어진 것이 쓸모없는 병두껑일지라도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 2017. 9. 9.
연인이라는 어리석음으로 잠깐 켜는 희미한 등불-<부운浮雲 Floating Clouds>(1955)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가난한 연인들, 어리석은 연인들. 연인이라는 어리석음. 한 때 달고 맛있게 먹었던 열대과일과 같은 시간. 도피 여행 중 그들처럼 동남아 시절을 보낸 여관 주인의 물음. "두리안 먹어봤지요?" 카메라는 1초정도 유키코의 흔들리는 표정을 담는다.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그 표정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열대과일이 없는 세계에서 열대과일을 찾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세계에서, 한사코 다른 이를 쫓는 남자(도미오카)와 불가능한 사랑을 쫓는 여자(유키코)는 가끔 함께 길을 걷는다. 눈앞의 모퉁이만 지나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없는 길을,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이 두 사람은 서로에 기대어 쓸쓸하고 소중하게 걷는다. 아주.. 2014. 9. 28.
익숙해서 가난한 발걸음-<우묵배미의 사랑>의 민공례가 홀로 찾았던 비닐하우스 2014. 1. 22 배일도와 민공례의 새살림이 '새댁'(유혜리는 극중 이름이 없다)에게 발각된 후 이 둘은 불가피하게 이별을 하게 된다. 배일도는 그의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민공례는 '차마'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홀로 살아간다. 몇 계절이 지난 후 민공례로부터 전화를 받은 배일도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가고 민공례는 여전히 아름답고 다소곳한 자세로 배일도를 맞는다. 이 둘은 마치 어제처럼 익숙한 암호를 주고받으며 그간의 시간을 단숨에 극복하는 듯보인다.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떠오른 기획안을 정리해 카페에 올리다 배일도가 식탁 아래 민공례의 발을 지긋이 밟으며 애교와 익숙한 신호를 동시에 보내고 있는 클로즈업 쇼트가 새삼 사무치게 떠올랐다. 흰 양말에 랜드로버 구두를 신고 있는 배일도와 슬리퍼.. 2014.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