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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47

달리기 살림⏤코로만 숨 쉬기(4) 2023. 11. 16 작업실이 춥고 몸도 좋지 않아 일찍 퇴근하는 길에 ‘카파드래곤’에 들러 원두를 샀다.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기에, 혹여라도 커피가 없어 작업이 중단될까 오늘도 괜한 염려를 하며. 지난번에 구매했던 원두 두 종류에 대한 후기를 전하며 신맛이 나는 원두를 내릴 때 부딪친 문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사장님 또한 퇴근을 준비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맛 나는 원두를 갈아서 커피 한잔을 내려주신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동안 그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자신은 20g이 한잔 양인데 이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원두가 부풀어오르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내리는 게 좋은지, 신맛이 나는 원두와 강하게 볶은 원두를 내릴 때 물온도는 어느정도가 적당한지, 정해놓은.. 2023. 11. 17.
새야! 2023. 11. 11 오랜만에 뵌 어머니 얼굴이 희고 밝아서 안심했다. 낮에 최종규 선생님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가을햇살 표정이 밝다고, 그래서 나도 따라 밝아지는 것 같다 전했는데 그 햇살이 어머니에게도 닿았구나, 어머니도 오늘 가을햇살을 머금으셨구나 싶었다. 지난번 뵈었을 때보다 걸음도 좋아보이고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어 나도 덩달아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며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시며 이제 남들과 똑같아 보인다고 해주셨다. 내게 내려앉은 가을햇살을 보셨나보다. 앉아서는 10분도 이야기하기 어려우셔서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 아래에 난 작은 종기부터 이웃을 통해서 산 햅쌀이 참 좋더라는 이야기를 거쳐 아버지가 이달 용돈을 지나치게 많이 썼다는 푸념과 고.. 2023. 11. 14.
모임이 쓰다 2023. 7. 2 1. 화명동 '무사이'에서 이미상 소설가가 쓴 『이중 작가 초롱』(문학동네, 2022)을 함께 읽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흥분과 긴장을 가득 머금고 읽었는데,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잘 풀어주어 모임을 하는 동안에서야 마음껏 소설집에 빠져들 수 있었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재미나고 통렬하게, 무엇보다 생생하고 정확하게 다루면서도 기록되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문단_내_성폭력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여러 피드에서 흐르고 있던 목소리들, 촘촘하게 따져묻고 집요하게 추적하다가 어느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목소리들을 떠올리면서 읽어내야 했기에 한달음에 읽진 못했지만 신나고 즐겁게 읽었다는 이들이 내어놓은 이야기에 기대어 소설집 곳곳에 슬픔뿐만 .. 2023. 7. 2.
질 자신_도둑러닝(5) 2023. 5. 2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이세돌의 '밈'으로 알려진 이 말을 달리기에 빗대어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1km를 5분대로 뛸 수 '없는' 강박과 다급함을 토로한 것이었지만 속도와 기록에 대한 즐거운 비명에 가까운 너스레이기도 했다. 장림에서 다대포를 거쳐 장림 포구를 돌아 장림 시장 둘레를 달리면 10km가 조금 넘었다. 일주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달리며, '평생 달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순간도 있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복싱을 더 잘 하기 위해서, 링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먼 거리를 온힘을 다해 달려서 다다른다'는 단순함과 명료함이 좋았다. 달리는 동안 거의 어김없이 한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거나 품게 되는 것 또한 좋았다. 달리는 동안 .. 2023. 5. 4.
4월 일기 2023. 4. 17 망한 사람으로부터 배움_비온후책방 강연을 마치고 최종규 작가님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늘 그렇듯 경이로운 이야기가 많았지만 칫솔질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이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이틀날부터 자연스레 최종규 작가님이 알려준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며 최종규 작가님을 생각했다. 작가님 치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칫솔질 이야기에 더 믿음이 갔다. 그저 망하기만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드물게, 망하면서 배울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망한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어떤 이는 망하면서 알게 된 것을 슬기롭게 건넨다. 망한 세상으로부터 배울 게 있고 망한 생활 속에서도 캐낼 것이 있다. 슬기롭게 망할 수야 없겠지만 망한 뒤에 한줌 정도에.. 2023. 4. 27.
만큼과 까지(계속) 2023. 4. 19.
꿈이라는 비평 2023. 1. 22 1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그이의 꿈 속에서 노닐다 나온 뒤 나는 사람들을 모아 꿈 속에서 내가 본 것들을 이야기 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 말한 것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것이었다. 꿈을 꿨다기보단 꿈이 나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꿈이 내게 말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 꾸었던 꿈을 생각하며 급히 적었다. 어쩌면 비평은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은 이가 쓰는 글이라고.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내가 꾸는 꿈이라 생각되지만 누군가의 꿈에서만 꿀 수 있는 꿈이라는 게 있다. 나는 그 꿈 속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마음껏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꿈은 내가 꾸는 꿈이 아니다. .. 2023. 1. 29.
그 사람의 말(투)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2023. 1. 9.
Take this Waltz—아픈 세상에서, 함께 춤을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 1934~2016)의 라이브 명반 (2009)의 수록곡 ‘Take this Waltz’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레너드가 특유의 진중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을 소개하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DVD로도 발매가 되었기에 그 실황 공연도 관람한 바 있는데, 그는 중절모를 벗어 한손에 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 옆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다. 그가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의 곁으로 다가가 그이를 소개할 때 우리는 샤론이 단순히 백 보컬이 아니라 레너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앨범의 첫 트랙인 ‘Dance me to the end.. 2022. 12. 19.
새 것과 헌 것 오늘도 우당탕탕거리며 일터로 나섰다. ‘우당탕탕’이란 말엔 어떤 사연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 우당탕탕거렸다는 건 오늘도 눈뜨자마자 게으름을 피웠다는 말이다. 일터에 갈 땐 할 수 있는만큼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마침 깨끗한 양말이 없어 새 양말을 꺼내 신고 잰걸음으로, 아슬아슬하게 일터에 도착했다. 우당탕탕-게으른-잰걸음-지긋지긋한-아슬아슬. 오늘의 내 살림을 헤아려보다 새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의 줄기를 가지게 되었다. 새 것은 기분좋고 설레는 마음을 갖게 한다. 포장지를 뜯어 사용하지 않아도 든든하고 쾌적하다. 특히나 가난한 이들에게 새 것은 더 가지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형편만 허락된다면 더 많이 쟁여두고 싶은 것일테다. 심지어 쓰지 않.. 2022.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