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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38

달리기 살림⏤코로만 숨 쉬기(4) 2023. 11. 16 작업실이 춥고 몸도 좋지 않아 일찍 퇴근하는 길에 ‘카파드래곤’에 들러 원두를 샀다.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기에, 혹여라도 커피가 없어 작업이 중단될까 오늘도 괜한 염려를 하며. 지난번에 구매했던 원두 두 종류에 대한 후기를 전하며 신맛이 나는 원두를 내릴 때 부딪친 문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사장님 또한 퇴근을 준비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맛 나는 원두를 갈아서 커피 한잔을 내려주신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동안 그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자신은 20g이 한잔 양인데 이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원두가 부풀어오르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내리는 게 좋은지, 신맛이 나는 원두와 강하게 볶은 원두를 내릴 때 물온도는 어느정도가 적당한지, 정해놓은.. 2023. 11. 17.
빈 채로 좋아하다 2023. 10. 21 작업실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안달이나서 곧장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냇물처럼, 따뜻한 봄볕이나 가을날 부는 바람처럼 느긋하게 내려앉는 좋아함을 느끼며 조금 더 서성였다. '좋아한다'는 말은 내게 금기어에 가까운데, 때때로 사람들과 어울릴 때 나도 모르게 그 마음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지만 깊게 품으려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만큼이나 좋아하는 (내) 마음에 깊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단박에 좋다 여기는 것은 거듭 의심하거나 본능적으로 그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곤 했다. 서서히 이끌리는 것에 대해선 일부러 흐릿하게 하거나 곁눈질로만 보려 애썼다. 충분히 좋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좋아하는 .. 2023. 10. 23.
길 잃기와 살림 잇기 2023. 5. 15 사람들을 피해 송도 해변가 주변을 바장이며 종일 걷(고 헤매)다가 돌아와, 밥을 지어먹은 후에 짧은 글을 쓰곤 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던 걸음 뒤에 남은 찌끼 같은 글이었다. 무언가를 쓰기 위한 하루가 아닌 쓰지 않기 위한 하루라 여기며 지냈던 나날이었다. 그곳이 어디일지 뚜렷하게 알지 못했지만 ‘여기가 아닌’ 바깥으로 나가보려 무던히도 애썼던 쓸모 없는 걸음이 쌓여 갔다. 낯선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보면 막다른 골목이어서 한참을 돌아나와야 했고 산책로를 걷다가도 어느새 길은 온데없데 없이 사라져 나는 숨가쁘게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길을 잃었을 땐 덩그러니 버려진 채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초연한 느낌과 서식지에서 벗어난 들짐승처럼 다급한 호흡이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2023. 8. 6.
긁어내고, 벗겨내고, 지우는 글쓰기 ‘하얀 바탕’이 지운 것들 글쓰기는 없던 무언가를 새롭게 더하는 일이 아니라 있던 것을 발견하거나 무언가를 빼고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생활 속에 소리 없이 쌓인 더께를 벗겨내는 것만으로도 ‘몰랐던 얼굴’을 만나게 되는 청소처럼 말이다. 하얀 바탕 화면 위에 검은색 글자를 ‘채워’나가는 작업을 글쓰기라 불러왔지만 외려 ‘하얀 바탕’을 ‘긁어’내고 ‘벗겨’내는 일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하얀 바탕’은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백지’라기보단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원치 않는 역할을 떠맡거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동안 쌓인 더께에 가깝다. 윗사람 앞에 설 때, 학교에 갈 때, 친구를 만날 때, 오늘도 누군가가 되어야 할 때마다 우리는ᅠ자신을 지우고 ‘하얀 바탕’이 된.. 2023. 7. 22.
생활파(派)의 모험 2020. 8. 14 습관과 버릇에 대한 생활글을 써보자는 제안은 각자의 생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생활 속에서 홀로 ‘탐구/탐험’(조형) 하고 있는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토로조차 타임라인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 그저 하나의 게시물로 업로드 되고 업데이트되는 형편이지만, 만약 당신이 ‘생활파(派)’라면 끝없이 업로드되는 먹거리들의 아귀다툼 바깥에서 애써 조형하고 있는 원칙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가령, 오늘 (남들처럼) 먹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도 끝내 먹지 않은 것들의 목록 같은 것 또한 있겠지요.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은 것들, 업로드할 수 없고 업데이트가 불가능.. 2023. 1. 18.
Take this Waltz—아픈 세상에서, 함께 춤을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 1934~2016)의 라이브 명반 (2009)의 수록곡 ‘Take this Waltz’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레너드가 특유의 진중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고 있는 멤버들을 소개하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DVD로도 발매가 되었기에 그 실황 공연도 관람한 바 있는데, 그는 중절모를 벗어 한손에 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멤버 옆으로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다. 그가 샤론 로빈슨(Sharon Robinson)의 곁으로 다가가 그이를 소개할 때 우리는 샤론이 단순히 백 보컬이 아니라 레너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앨범의 첫 트랙인 ‘Dance me to the end.. 2022. 12. 19.
불쑥 건너는 밭은 잠에서 깨면 몸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무언가를 잡기보단 오늘도 무심하게 환한 이 세상이 무사한지 더듬어볼 뿐이다. 극적인 것이나 드라마틱한 기대 없이. 벽에 귀를 가져다대면 벽 너머의 희미한 소리가 금지된 무언가가 번지듯 천천히 선명해지는 것처럼, 멀리서 오고 있는 열차의 기척을 희미하게 느끼기라도 하듯 지난밤과 잠과 꿈과 몸의 기척을 더듬어본다. 서로가 너무 가깝거나 아득해서 온통 뿌옇고 희미할 뿐이다. 물 한 잔이 필요하다. 작은 파도가 일렁일 때 잠시 나타나는 물보라처럼 차갑지 않은 물 한 잔이면 몸에도 작은 물보라가인다. 소꼽놀이용 청진기를 가져다대보는 꼴이겠지만 미동 없는 몸을 무심하게 살피며 전자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것처럼 변함없이 무사.. 2022. 3. 20.
문학의 곳간 74회_박완서・장미영,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수류산방, 2012/2018) [74회 문학의 곳간] 안내 74회 문학의 곳간에선 2011년에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이 남긴 최후의 구술이자 가장 종합적인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박완서-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수류산방, 2012)를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4회(2013년, 장전동 헤세이티)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엄마의 말뚝』(박완서 전집, 세계사)을 함께 읽었던 바 있습니다. 올해는 박완서 선생님이 작고하신지 1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올초부터 박완서 선생님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고 또 올해 안에 출간 예정된 책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나야 하는 작가인 박완서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구술작업이어서 더욱) 생생한 육성을 따라, 늦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작업했.. 2021. 4. 9.
문학의 곳간 73회_박솔뫼, 『우리의 사람들』(창비, 2021) [문학의 곳간 73회] 박솔뫼, (창비, 2021) 일시 : 2021년 3월 27일 토요일 오후 3시~ 장소 : 중앙동 ‘회복하는 생활’ 인원 : 열 명(세 자리 남아 있습니다) 참가비 : 만원(우리은행 1002-746-279654) 문의 : 010-9610-1624 주최 : 생활예술모임 곳간 협력 : 회복하는 글쓰기 2021. 3. 22.
문학의 곳간 70회_홍은전,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 [70회 문학의 곳간] 안내한달 순연되었던 (70회)이 이달 말에 열립니다. 70회 문학의 곳간에선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을 함께 읽습니다. 한겨레에 칼럼이 연재될 때부터 빼놓지 않고 찾아 읽었던 귀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서 나왔습니다. 너무 반가운 출간 소식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듯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생명을 포기하는 곳, 연대가 끊어지는 그 모든 곳이 시설이다. 그러니 모두들, 탈시설에 연대하라."(, 2017.1.2)라는 문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장 약한 자리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힘을 길어올리는 홍은전 작가의 글과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내고 있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문학의 곳간 70회]『그냥, 사람』(봄날의.. 2020.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