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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글쓰기모임12

어떤 후기, 어떤 바람 2016. 6. 8 1.이 사람들과 더 좋은 글을 함께 읽고 싶다, 보석 같은 글들을 선물하고 싶다, 읽기를 통해 아낌없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년 가을, 중앙동의 작은 책방에서 시작한 이 어느새 2기라는 시간을 훌쩍 지나왔습니다. 쉽지 않은 소설 책을, 그것도 단편집을, 별다른 정보도 없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읽기가 허락되지 않는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애써 읽고 또 읽지 못할 때는 읽어야 한다는 걱정으로, 염려로 읽기를 지속하느라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은 여정이었지만 따로 또 같이 읽기의 시간을 완주했다는 것에 축하의 인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11주간 동시대의 한국 소설이 각자의 일상과 생활에 어떤 모습으로 내려앉았을지 그 결과 무늬가 궁금합니다.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사람과 함께 .. 2017. 12. 27.
대피소 : 떠나온 이들의 주소지 2015. 11. 13 망한다는 것, 결별하고야 말게 될 것이라는 ‘그 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함을 느낍니다. 그간 주변에 ‘글쓰기 모임’이 드물었다는 것이 ‘생활-글-쓰기 모임’의 고유성을 돋보이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차라리 ‘생활-글-쓰기 모임’이 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음을 예감하며 이 모임 또한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시작의 문을 열었었지요. 끝의 대한 예감으로 시작의 걸음을 내딛는 결기 속에 다소간 과장된 낭만의 뉘앙스도 느껴집니다. 그걸 무릅쓰고라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시작을 망각하는 것은 이윤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면 분명 타락의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대피소’와 같은 곳이라 지칭했던 것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생활-글-쓰기 모임'.. 2016. 1. 19.
해변이 남긴 무늬_이별례(7) _대마도의 어느 해변 2015. 5 전날 밤 태풍이 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간밤에 별일 없었냐고 물었지만 우린 괜찮았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태풍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유난히 거세었던 그날의 비바람을 4인용 텐트가 막아주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해변을 걸었다. 해변에 남겨진 거대한 무늬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간밤에 휘몰아친 태풍이 남긴 무늬일 것이다. 그리고 휩쓸려갔다가 다시 휩쓸려오기를 반복하며 끝내 휩쓸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해변에 모여 있는 모래들의 무늬일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떠밀려온 작은 자갈의 무늬이기도 할 것이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흔적을 남기는 바람의 무늬이면서 저 멀리 달의 중.. 2016. 1. 16.
각자의 극단으로, 생활 스타일로―다시 ‘생활-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며 ‘극단적인 생활’이란 말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극단적’이라는 시한부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 관형사가 지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생활’이라는 명사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꼴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극단적인 것’ 또한 고유한 생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 하나의 생활이지만 머지않아 파괴될 것을 예감할 수 있는 시한부 생활엔 ‘극단’과 ‘생활’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극단’이 극구 피해야 하는 생활의 감각처럼 여겨지는 것은 생활이란 무난하면서 평온하며, 반복할 수 있는 조건의 문턱이 낮아야만 성립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단적인 생활’이란 당장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곧 무너져 내릴 것임을 예감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이를 ‘생활’엔 .. 2015. 12. 6.
재활과 회복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버티는 데 열중하며 내내 내몰리기만 하는 시간이 잦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온몸이 경직되어 절벽을 구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버티고 있다 착각하며 한참을 더 구르게 된다.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구르기라는 가속력에 스스로를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예민하고 민감한 성정은 내가 파놓은 구덩이 안에서만은 이상하리만치 무디고 미련하기가 이를 때가 없어져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 한군데가 바스라지고 나서야 구르기를 멈추고 겨우 바깥으로 나오곤 한다. 다 내 어리석음 탓이리라, 홀로 되뇌며 몸을 털고 일어나 다만, 걷는다. 뜻한 바가 있어 걷는 게 아니다. 다만, 걷는다. 그렇게 걷다보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하던 굴레가 세속의 구조가 아닌 어리석음의.. 2015. 11. 28.
<생활-글-쓰기 모임> 2기 2015. 11. 8.
간절함 없이 2015. 10. 27 손가락 끝이 퉁퉁 부었던 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끝에 차오른 누런 고름을 바라보며 고통의 원인을 알고도 손쓸 수 없었던 그 밤에 나는 다급하지만 무력한 인터넷 검색으로 ‘생인손’이라 병명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검색 하고 또 검색해도 병원에서 시술을 받는 것 외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조갑주위염 Paronychia’. 그날 밤 10년동안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병원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손끝의 고통이 고름과 함께 차오를만큼 차올라 손끝을 뚫고 나올 것 같았던 그 밤에 내가 다급하게 찾았던 것은 바늘이었다. 바늘만 있으면 이 고름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 통증도 조금 가라앉겠지. 아무리 뒤져봐도 집엔 바늘이 없었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온 바늘로 누런 고.. 2015. 11. 8.
한번이라는 무상의 은총 2015. 10. 21 ‘한번’은 모두에게 관대하다. 우리 모두는 한번 태어나고(물론 태어났다는 사태와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에 가까운 일이긴 하지만) 한번쯤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두 번 다시 없을 경험을 한다. ‘한번’이 주어의 자리에 있을 땐 ‘안다’라는 술어보다 ‘모른다’라는 술어와 더 잘 어울린다.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한번의 목록은 대개가 모르고 한 것이거나 모르면서도 한 것들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번은 하지 두 번은 못한다’는 관용어는 두 번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 말만은 아니다. 눈길을 끌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없는 듯 있는 ‘한번’의 자리를 눈여겨 볼필요가 있다. ‘한번’의 경험 없이는 ‘두 번’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다. ‘한번은 하지 두 번은 못.. 2015. 11. 5.
누군가의 편에 서서(1) 2015. 6. 23 익명의 액자공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시간, 독자가 되는 시간. 나는 알고 있다. 독자의 시간이란 액자를 만드는 시간임을. ‘읽기’란 작은 액자를 만들어 그 글을 어딘가에 걸어두는 일이다.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액자공’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액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도 무언가를 감싸고 들어 올리는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 한 명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이 그 작가와 작품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는 액자공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그 익명의 이름들이 작가와 작품의 이름 안에 감춰져 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2015. 7. 30.
안심의 영주권 2015. 7. 23 임권택 영화를 향한 정성일의 변치 않는 열정적인 애정과 구애를 접하면서 감지했던 사실을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에 대한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의 애도 섞인 헌정 속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가(大家)를 다루고 있는 수많은 글들 중 읽는 이에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천재적인 위대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일상과 같은 부분에 밑줄을 칠 때라는 것을. 내게 ‘비범’이란 오직 일상과 생활이라는 ‘평범의 토양’에서만 길어올려지는 것이다. 그런 염원을 품고 현장에서 인용했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대한 하스미 시게이코의 표현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빌린 책을 반납일에 쫓겨 급하게 읽으며 이 구절과 짧은.. 2015.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