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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19

기지개를 켜듯 접힌 시간을 펼쳐 2023년 하반기 주제를 ‘가난이라는 주름’으로 묶어보았던 것은 알게 모르게 접어둔 것들을 펼쳐보면 좋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펼쳐봐야겠다 싶어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처럼 기억을 접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저마다가 놓인 형편 탓에, 또 갖은 이유로 접어두어야만 했던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스스로도 잊고 있던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자리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자리를 솔직한 고백만이 아니라 탐구와 탐색도 함께 하면 좋지 않을까 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멈칫하게 하고, 뒷걸음질치게 하죠. 거기에 접힌 기억과 시간이 주름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빈곤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가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인 것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2024. 2. 24.
뒤쫓다-뒤따라가다-뒤에 서다-돌보다 ‘뒤쫓다’는 낱말을 앞에 놓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해요.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엔 ‘뒤-쫓다’를 “뒤를 따라 쫓다”와 “마구 쫓다”라고만 풀이되어 있습니다. 풀이말엔 나오지 않지만 ‘뒤쫓다’는 무언가를 바로 잡기 위해, (도망가는 무언가) 뒷덜미를 잡기 위해,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으려는 태도가 배어 있는 듯합니다. ‘바로 잡기’는 ‘손아귀로 움켜쥐는 일’과 이어져 있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낱말을 풀어볼 수 있지 싶어요. 뒤쫓는 건 바로 잡기 위해서라기보단 혹여나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놓쳐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 뒤를 쫓아 가는 것이겠지요.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깁니다. 그.. 2024. 1. 24.
살림 씨앗(3)_바람, 늘, 어린이 ㅎ : 제가 요즘에 곳간에서 나온 을 읽고 그거 때문에 ‘여행’에 심취해 있거든요. (곳간지기 : 오~~!) 뭔가 말만 나오면 여행을 떠올리게 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바람이 ‘여행하는 숨결’이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서 이렇게 풀어봤어요. “다대포에 4월이 오면 사스레피가 내쉰 숨결과 마른 파래와 조개들이 내쉰 숨결이 한 데 어울려 봄맞이 하러 갑니다.” 제가 사는 다대포에 사스레피나무 군락이 있어요. 3월이나 4월이 되면 사스레피나무에서 작은 꽃이 피는데요, 향기가 엄청나답니다. 그래서 사스레피나무 군락과 제가 사는 집은 꽤 떨어져 있지만 바람이 불면 저희 동네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벌써 냄새가 다르죠. 특히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람이 불잖아요. 그러면 냄새를 맡게되는데 여러가지 향이 난답.. 2024. 1. 22.
『대피소의 문학』 저자 인터뷰 문학의 역할이나 소명에 대한 기대가 회의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대피소’라는 긴급한 장소와 ‘문학’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왜 ‘대피소의 문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지요? 저뿐만 아니라 참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무기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한동안 ‘구조 요청’에 누구도 응답하지 못했다는 부채감 속에서 지냈습니다. 참사의 사회적 의미나 현실을 진단하는 것이 아닌 참사 현장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현실’과 ‘현장’의 온도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깥을 향해 도움을 구했던 이들이 외려 또 다른 누군가를 구해내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가령, 유가족들의 투쟁이나 참사 현장에 관한 증언)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무기력이야말로 재난 시스템이 .. 2023. 12. 7.
살림 씨앗(1)_우리는 말숲으로 간다 부산에 터한 출판사 과 전남 고흥에 터한 우리말 사전을 짓는 숲노래(최종규)가 함께 '살림사전' 쓰는 자리를 엽니다.매달 부산 중앙동 '곳간'에 둘러앉아 각자가 돌봐오거나 돌보고 싶은 살림 낱말을 꺼내서 풀고 손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아래와 같은 순서로 펼쳐볼 참입니다. ① 각자가 낱말을 고르고(영어, 한자, 우리말 가리지 않고) ② 고른 낱말을 우리 나름대로 풀이해보고 ③ 국립국어원 사전과 숲노래(최종규) 사전과 비교해보고 ④ 함께 손질합니다. 🌳 함께 꾸릴 살림사전은 아래와 같은 길을 트며 나아갈 참입니다. 1. 한 사람이 엮는 낱말책을 여러 사람 손길로 읽고 짓습니다. 2. 함께 나눌 낱말책을 우리 손빛으로 스스로 짓고 나눕니다. 3. 우리는 누구나 글님·그림님·별님인 하루를 폅니다. ⏤우리는 말숲.. 2023. 11. 7.
오늘 꼭 건네야 하는 이야기 어떻게 이 많은 가족이 변화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감지하고 가늠하며 이야기로 펼쳐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사는 곳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취급이 구성원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스미는지, 마치 온도계처럼 ‘세상의 기온’에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세라 스마시의 를 읽어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곧장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나 냉랭한 것일까. 어째서 여기-지금-우리 이야기를 펼쳐내지 않고 있는걸까. 무엇이 이야기하는 걸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는 “날아서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는 땅”으로 취급된 지역에서 대물림되는 가난의 악순환을 끊어내야겠다는 의지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곳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팽팽.. 2023. 11. 7.
함께 부를래요? 2023. 11. 3 작년 5월, 1인 출판사 에서 첫 번째 책을 냈다. 언젠가는 출판사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게 2022년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언덕을 빠르게 내려가다가 속도를 이기지 못해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책을 낸 것 같다. 힘에 부쳤지만 열심히 홍보하고 여러 번의 북토크를 꾸리는 동안 꽤나 즐거웠다. 누군가가 설 수 있고, 그때문에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무대'를 꾸리는 일은 늘 즐겁다. 곧 두 번째 책이 출간된다. 한 정부 기관지에 3년간 연재한 글뭉치를 넘겨받아 여러 번 읽고 손보고 매만지는 동안 첫 인상과 달리(!) 책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를 정리해 올 봄, 지역 출판지원금 사업에 내었고 선정이 되었다. 봄부터 여름 사이에 글 전체를 다시 읽.. 2023. 11. 4.
빈 채로 좋아하다 2023. 10. 21 작업실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안달이나서 곧장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냇물처럼, 따뜻한 봄볕이나 가을날 부는 바람처럼 느긋하게 내려앉는 좋아함을 느끼며 조금 더 서성였다. '좋아한다'는 말은 내게 금기어에 가까운데, 때때로 사람들과 어울릴 때 나도 모르게 그 마음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지만 깊게 품으려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만큼이나 좋아하는 (내) 마음에 깊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단박에 좋다 여기는 것은 거듭 의심하거나 본능적으로 그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곤 했다. 서서히 이끌리는 것에 대해선 일부러 흐릿하게 하거나 곁눈질로만 보려 애썼다. 충분히 좋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좋아하는 .. 2023. 10. 23.
더 많은 가난⏤바깥으로 나아가며 이어가기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은 한국이 IMF를 한참 지나는 길목에서 공개된 소설입니다. 그 당시 흔하게 접해온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나 그와 무관하게 마침내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뚜렷하게 파악하기 힘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밤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매일 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립니다. 가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가난은 생생함보다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건 배수아가 가난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증언하거나, 해결의 필요성이나 .. 2023. 10. 18.
가난이라는 주름 가난이라는 주름 각자 입안에 감춰둔 충치[보석] 같은 그림자가 아닌, 모두가 가진 밑그림 얼룩[반짝임]처럼 금새 눈에 띄는 모든 색깔을 단박에 집어삼키는 검은[흰] 색깔 가까이 있지만 한쪽으로 밀쳐둔 서둘러 지워버리고 치워버린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시간 2023년 하반기 에선 ‘가난’에 관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장애물이나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겨왔을 뿐 좀처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던 ‘가난’의 안팎을 다섯 권의 책을 타고 넘나들어보려고 합니다. 이 탐험 안에서 ‘한쪽으로 밀어내어도 어느새 곁에 있는 것들’과 마주해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가 열리길 기대합니다. 9월 23일_(97회) 배수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 10월 28일_(98회) 세라 스마시, 『하틀랜드』(홍한별 옮김.. 2023.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