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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25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 2023. 7. 19 지난달부터 생각나는대로 하루 계획표를 짜보고 있다. 열 가지 정도 적어두어도 서너 개도 지우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흥미가 점점 떨어지지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면 근처에서 뭔가를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매일 시 한 편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조은 시인이 펴낸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하반기 프로그램 주제를 '가난'으로 잡아두었는데, 조은 시인이야말로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가난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을 애써 위무하거나 과시하지도 않는다. 주변엔 온통 가난한 것 투성이어도 흐릿하거나 막연한 것 하나 없이 맑고 뚜렷하다. 예전에 읽었던 산문집과 시집엔 당당함이 묻어 났는데, 이번 시.. 2023. 7. 19.
흐트러짐 없이 사위어가는 것 2023. 1. 21 오소영 작가의 개인전 (2023. 1. 20~30)을 보기 위해 '18-1 gallery'에 들렀다. 1,2층을 여러번 오르내리며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선 채로 서성였다.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적막하고 쓸쓸했지만 사위어간다는 것이 꼭 사라지는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 서서 사위어가는 것을 지켜보(내)는 동안 사그라지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타오르는 것, 타들어가는 것, 꺼져가는 것이 하나의 몸으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피어오르는 몸은 흐트러짐이 없다.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어야 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오래도록 들판을 보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저 들판과의 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지켜(보)낸 시간의 기록이.. 2023. 1. 24.
끄트머리 눈곱처럼 작은 글씨 2022. 12. 7 ‘농촌 어린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이오덕 선생이 1958년부터(1952년 것도 한 편 들어가 있다) 1977년까지 20년 동안 주로 농촌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그때그때 모아두었던 것을 엮은 책이다. 지난날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품은 시집이라는 드문 책이지만 으레 작고 연약한 것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티나지 않게!) 은근히 업신여기며 한쪽으로 미뤄두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오덕 선생의 발자취를 뒤쫓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침판 머리말」을 읽자마자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단박에 여러 꼭지를 읽지 못하고 한두 꼭지정도만 겨우 읽고 오래도록 뒤척인 탓에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야 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맑.. 2022. 12. 7.
[출간 일지] 아이처럼, 바람처럼, 메아리처럼 [출간 일지] 2019. 4. 21_아이처럼, 바람처럼, 메아리처럼 진주에서 진행한 글쓰기 강좌 2회차. 늘 그렇듯 이미 형성되어 있는 커뮤니티에서 진행하는 강의는 예정된 시간을 넘기고도 끝날 줄을 모른다. 3회차 강좌여서 강의 형식이 적합하지만 할 수 있는만큼 글을 써보기로 한 터. 구성원들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 받노라면 의도없이 도착하는 크고 작은 깨침의 순간으로 웬만한 피로는 어느새 온데간데 없어진다. 정제되지 않은 글을 읽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런 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조언 하는 일은 쉽다. 어떤 글이든 그 사람의 이력이 그림자처럼 드러나 있기 마련이어서 곳곳에 작은 의욕의 기미가 쟁여져 있다. 그곳에 밑줄을 치는 일이면 충분하다. 쓰면서 알게된다고 했지만 쓰고도 알지 못했던 것을 마침.. 2019. 4. 24.
출간 일지 _메모 2019. 4. 20 2019. 4. 20. 1. 어제 한 동료가 책 출간을 축하한다며 한 권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2. 첫 번째 평론집을 읽고 있던 사촌을 떠올리며 연락했다. 군대에 있을 때 꽤 여러 통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촌의 이름을 오랫만에 적고 서명을 했다. 3. 대학 시절 록밴드 활동을 함께 했던 후배가 책 인증샷을 보내주었다. 4.과 친구들이 5월엔 책잔치를 하자고 제안해주었다. 5. 진주 '소소책방' 글쓰기 강의를 마친 후 참석자 전원이 책을 구매해주셨다. 6. 동료 평론가가 책 출간을 축하한다며 멋진 명함 케이스를 선물해주었다. 쓸 일이 많이 생길 거라는 덕담과 함께. '회복'이라는 게 뭘 뜻하는 것이냐고 묻길래 두서 없이(그러나 짐짓 두서 있는 것처럼) 이야기 했다. 을 소개하고 안내하면서 '회복하는 생활'.. 2019. 4. 22.
좌절됨으로써 옮겨가는 이야기 잠수와 읽기 어떤 ‘읽기’의 순간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잠수를 닮아 있다. 읽기란 우선 고요해지는 일이다. 숨 참기, 아래로 내려가 경계와 대면하는 것, 고요. 고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고요 속에서만 겨우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상태에서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그걸 알기에 오늘도 고요해질 수 있어야 한다. 고요해지지 못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문장이 있었다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 자책한다. 오늘 내가 놓쳐버린 문장들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고 잠수 한다. 고요 속으로 내려가 잠깐, 겨우 읽는다. 활자 뭉치로만 보였던 페이지 속에서 하나의 문장과 만난다. 깊은 바닥 아래에서 누군가의 잠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2016. 1. 6.
10대라는 비평 2014. 12. 28 / 2015. 12. 20 작년 이맘 때쯤 생활예술모임 의 송년회가 송도 집에서 열렸고 그날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집을 가득채웠다. ‘이내’와 ‘곡두’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1층 서재에서 잠깐 서영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 몇번 참여했고 에서 또 몇번 만나 안면은 있었지만 ‘죽음’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 이야기를 듣곤 가끔 걱정스레 떠올린 것말고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는데 이날 지갑에 가득한 영화표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해동안 본 영화에 대한 짧은 촌평이 이어졌던 것이다. 재미 있었다거나 재미 없었다라는 간명한 규정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좋았던 영화였다라는 식의 솔직하면서도 진중한 감상평이 무르익어가면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한 짧은 소회를 그야말로 핵심적.. 2015. 12. 25.
무명의 삶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삶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보인바 없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평범한 소설’(『스토너』)을 덮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커다란 질문을 관통시킬 수 있는 답변을 해낼만한 능력은 없지만 그럼에도 응답해야 한다면 ‘작은 기쁨’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 소박한 어휘 조각은 곧잘 삶의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다소 긴급하게 부정적인 문맥으로 말하고 싶다. ‘작은 기쁨’은 ‘소박한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욕망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작은 것을 요구한다는 욕망의 규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욕망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거나 평범과 보통의 세계를 보살피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들.. 2015. 12. 18.
유나의 '체질'(<유나의 거리>-①) 2014. 10. 29 "엄마, 전 제가 어딜가든 저랑 친했던 언니, 동생들, 버리고 갈 순 없어요. 전 그 사람들이랑 어울려 사는 게 제 체질에 맞고 좋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 46회(임태우 연출, 김운경 각본, JTBC, 2014) 46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엄마를 만난 후 유나의 삶은 급격히 변한다. 한번도 가져본적 없던 아파트와 자동차, 헬스 회원권은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간 함께 어울렸던 동료들, 이웃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댓가를 요구한다. 유나가 흔들렸던 것은 갈망했지만 가져보지 못한 엄마의 품과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 때문이였을 것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유나는 부모없이 홀로 고생했던 시간을 보상 받길 원하거나 그런 원한의 감정을 볼모로 삼아.. 2014. 10. 29.
도움닫기 : '함께'라는 이중의 서명 2014. 10. 21/26 도움닫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발구름판을 힘차게 딛고 뛰어오르는 일이다. 그것은 고독(孤獨)하고 독아(獨我)적으로 보이는 공부라는 행위 속에 다른 이들의 손과 발로 일구어낸 노동이 전제되어 있음을 매순간 감각하고 그것을 각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꿔 말한다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홀로가 아니라는 증표이며 나아가 홀로이지 않겠다는 선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부란 결국 도움닫기다. 누군가가 마련해둔 발구름판을 힘차게 딛고 도약한다는 것. 그 도약의 속도와 거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물리적인 수치의 우열보다 도약을 통한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모든 고유한 표현은 도약을 발판으로 하고 있으며 그 도약을 가능케 하는 발구름판은 다른 이들의.. 2014.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