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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뭉개진, 뭉개지는 얼굴

by 종업원 2010. 4. 11.

처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매력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탐욕적이고 가벼운 것이어서, 나는 한사코 그 말을 쓰는 것(기록)을 피하기만 했었는데, 그러나 어쩌나, 그동안 나는 무수히 많은 '처음'을 말해왔구나. 

그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뱉는 '처음'이 아니라 목적에 결박당한 처음을 나는 얼마나 많이 말해왔던가. 그 꽃잎 같은 처음은 내 입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더렵혀져 왔던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인가. 목적을 잊은 '처음'이 내게로 오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지 않고 무심히 맞이할 것인가.
불안한 봄밤, 엉덩이를 들썩이며







레오 까락스, <퐁네프의 연인들> 1991 中


드니 라방의 얼굴을 보라. 훼손되어 있는 얼굴, 그럼에도 단독성을 획득하고 있는 그 얼굴을, (소위 얼굴로 먹고 산다는)'배우'는 아스팔트 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문지른다. 범죄의 현장을 지우려는 초범의 미숙한 범인처럼, 아니 증거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잔혹한 연쇄 살인마의 무념하기에 위엄 있는 태도로 그는 자신의 원본성을 스스로 훼손한다. 그의 얼굴은 아스팔트 위에 남겨지는가. 그는 얼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얼굴이라는 지도를, 지워도 지워도 재생되는 그 감옥을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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