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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2011년 4월 21일

by 종업원 2011. 4. 24.

 

   서울에서 세희가 내려왔다. 늘 내려오는 길에 연락을 하는 그 버릇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는 적응이 좀 된 듯하다. 마감을 훌쩍 넘은 원고를 뒤로하고 새벽까지 통음을 했다. 오랜 시간 방치해 놓은 내 방이 부끄러웠지만 세희를 내 자취방에 재우고 다시 연구실로 올라와 원고를 쓰다가 잠들었다. 주인도 돌보지 않은 방으로 돌아가 하룻밤 손님이 남겨 놓은 흔적을 보니 괜실히 슬퍼졌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샴푸 빈 통과 비눗물로 가득 채워진 세숫대야, 탁한 물이 고인 변기. 내가 내 집을 내버려두었으니 손님 또한 그렇게 하룻밤의 시간을 내버리듯 떠난 것이다. 샤워를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샤워실 바닥에 끼어 있던 물때까지 깨끗하게 치웠다. 주방 한켠에 쌓아 두었던 쓰레기들 분리수거를 해서 밖에 내 두었다. 삼푸를 사고 틑어졌던 바지를 옷수선에 맡겼다.

 

  근 한 달 가까이 내 방에 돌아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원고를 쓰고 세미나 준비를 하고 연구소 업무 처리를 하고 수업 준비를 했다. 그전에도 퇴근은 늘 새벽에 했지만 3-4월 동안 집으로 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쪽잠을 잔 건 그저 바쁘거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요량만은 아니었다. 생활의 리듬이 무너졌다는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 나 스스로도 그것을 알기에 내게 자꾸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3-4월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피로했던 듯하다. 그 피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나에게 내가 벌을 주는 동안 봄이 다 가버린 듯하다.

 

  작년 겨울 오랜 친구를 불러 내 방에서 와인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한 적이 있다. 밤새도록 보일러가 돌아갔던 밤. 그때 빌려주었던 사각 팬티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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