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

by 종업원 2023. 7. 19.

2023. 7. 19

지난달부터 생각나는대로 하루 계획표를 짜보고 있다. 열 가지 정도 적어두어도 서너 개도 지우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 흥미가 점점 떨어지지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간다면 근처에서 뭔가를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매일 시 한 편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조은 시인이 펴낸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문학의 곳간> 하반기 프로그램 주제를 '가난'으로 잡아두었는데, 조은 시인이야말로 가난이라는 외투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가난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을 애써 위무하거나 과시하지도 않는다. 주변엔 온통 가난한 것 투성이어도 흐릿하거나 막연한 것 하나 없이 맑고 뚜렷하다. 예전에 읽었던 산문집과 시집엔 당당함이 묻어 났는데, 이번 시집엔 그런 뚝심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곳곳에서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곳에 남아 있는 이가 휩쓸려가버린 것들을 바라보는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 그래서 몇몇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나는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어 조은 시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사람 중에 하나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걱정 하나 없는 얼굴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여자는 턱을 조금 들고
태양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우아하고 젊었다

만일 내가 아기를 품에 안았다면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아기의 미래를
바구니처럼 끌어당겨 보며
시름에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도
막막한 슬픔을 느끼곤 했으니

실마리가 없는 걱정거리를 안고
사직동 언덕길을 오르는
내 앞에서 여자는
어제도 그런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내겐 한순간도 없었던
꿈을 꾸는 여자가
봄날의 눈사람처럼 빛났다

⏤조은, 「봄날의 눈사람」 전문(『옆 발자국』, 문학과지성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