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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작은 글씨로 그린 마음 무늬

by 작은 숲 2024. 6. 11.

2024. 6. 11


스무살 무렵에 시도 잘 읽어내고 싶어서 애를 써서 자주 시집을 펼쳤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읽고 또 읽기를 되풀이했는데, 대체로 이야기꼴을 갖추고 비유가 현란하지 않은 장정일이 쓴 시집 두 권이 좋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 군대에 잡혀가기 전에 다행히 시집을 여러 권 읽은 바 있어서 읽을 거리로 자리 잡혀 있었고, 뭔가를 읽을 짬이 없는 군대에선 짱박혀서 읽기엔 시집만한 게 없었다.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GOP에 들어가 철책선을 지키는 일을 했는데, 나는 야간 근무를 서면서 졸거나 잔 적이 거의 없었다. 고참이 잠들면 건빵 주머니에 넣어둔 시집을 꺼내 읽거나 두 번 접어서 여덟 면으로 나뉜 편지지에 밑도 끝도 없는 편지를 썼다. 오늘 이오덕 어른이 펴낸 마지막 시집에 실린 <감자를 깎는다>를 읽다가 이등병 때 마음으로 품었던 시가 <석유를 사러>였다는 걸 떠올렸다.


늘 가난한 사람 이야기에 이끌려 왔기에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뭔가를 꿈꾸는 이가 펼쳐내는 이야기가 좋았다.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와 닿아 있으면서도 달랐는데, 석유를 사지만 난로를 켜지 않고 난로를 켜는 상상만으로도 너끈히 몸을 데우는, 가난뱅이만이 펼쳐낼 수 있는 밑도 끝도 없는 활력이 좋았다. 책을 읽을 수 없던 이등병 땐 대학 동기에게 <석유를 사러>를 편지지에 적어서 보내달라 부탁했는데, 동기가 손수 써서 보내준 <석유를 사러>를 감춰두고 자주 펼쳐봤었다. 


이오덕 어른이 쓴 마지막 시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고든박골 가는 길⟫(실천문학사, 2005)을 읽다가 <감자를 깎는다>를 만났다. 새벽녘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한 늙고 병든 이가 감자를 깎는 얼거리를 담은 시다. 쓸쓸하고 서글픈 이야기가 아니라 감자를 깎아온 삶을 돌아보며 감자를 먹고, 감자를 깎고, 감자와 함께 한 이들을 떠올리며 감자를 “깎는 재미로 / 깎는 맛으로 깎”기에 “감자 깎는 맛이 / 감자 먹는 맛보다 더 낫다”고 노래 부른다.  

시 끝에 ‘2001. 2. 12 새벽’이라고 적어두었는데, 앞에 실린 시 <하얀 눈 덮어쓰고>도 같은 날짜다. 이땐 아마도 병이 깊어 쉬 잠을 들지 못하는 날이 잦았던 듯싶다. 깨었지만 다시 잠들지 못해 시를 썼던 새벽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이오덕 일기 1999~2003⟫를 펼쳐서 살펴보니 2001년 1월 27일 일기에 “오늘부터 날마다 한 편씩 시를 쓰자고 마음먹었다.”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내 정신을 긴장시켜서 제대로 기록을 남길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라고 한다. <감자를 깎는다>를 쓴 2월 12일 근처를 살펴보니 2월 1일과 2월 17일 일기만 있다. 2월 1일 일기는 자다 깨어 손수 기저귀를 만드는 이야기다. 자다가 물똥을 싸서 잠에 깨어 옷을 갈아 입고 몸과 마음을 살피다 수건에 운동복에서 떼 놓은 고무 밴드를 바느질해 기저귀를 만든다. 

“내 손으로 내가 쓸 기저귀를 만들다니, 사람 사는 것이 이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그렇다. 이것은 부끄러워할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다. 가장 절실한 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마치 밥을 먹는 것과 같이.” 

 ⏤이오덕, ⟪이오덕 일기 1999~2003⟫, 양철북, 2013, 175쪽(2001년 2월 1일 목요일 맑음).  


몸을 내려놓기 전 일기는 늙고 병든 몸을 더듬으며 쓸쓸하고 서글픈 마음에 기대는 길이 아니라 “아픈 것을 찾아서 같이 아파 준다”(강신무)는 말을 따라 아픈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보살피며 누리를 새롭게 바라보고 나아간 나날이라 여겼다. 가난한 사람은 외려 가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으며 이들에게 가난은 손수 짓고 꾸리는 살림을 더 옹골차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북돋는 땔감이 되는구나 싶다. 돌아보면 내가 가난에 이끌린 까닭도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 아니라 단단하고 꼼꼼한 손길과 눈길, 마음씨를 보고 느꼈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뚜렷이 알겠다. 


⟪일하는 아이들⟫을 읽었을 적에 아이들이 쓴 시 아래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적바림한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던 까닭 또한 마음으로 썼다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글은 마음 무늬를 펼친 그림이겠구나, 그렇게 그린 그림/글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구나, 그러니 문학 또한 마음 무늬를 펼치는 길로 나아가야 할테고 그래야 누구나 문학을 누릴 수 있겠구나 싶다. 다음 대목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늘 벗을 그리는 마음에 더 이끌려왔기 때문이다. 

감자를 깎으면 또 권정생 선생 생각
<감자떡>이란 시
감자같이 울퉁불퉁한 산골 아이들 얘기를 쓴 동화
권 선생의 문학은 감자를 먹고 사는 사람들 문학이란 생각.

⏤이오덕, <감자를 깎는다> 부분, ⟪고든박골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