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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부사적인 것(1)

by 종업원 2013. 6. 13.

별점과 별자리

 

‘별점’으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상황이 올까? 이 물음은 ‘별점 평가’를 반대하거나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학 작품 옆에 별점 평가라는 ‘비문학적인’ 형식의 도입을 통해 어떤 문제의식을 길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별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대중음악과 영화를 떠올려본다면 문학에 별점 평가를 도입할 때 초래될 상황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다. 문학의 세속화 혹은 상품화. 숱한 음악/영화 잡지들이 줄줄이 폐간을 하게 된 이유를 별점 평가에서부터 찾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그럼에도 별점 평가가 ‘작품’과 ‘상품’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는 점, 그것이 ‘비평의 자리’를 ‘정보의 자리’로 대체해버렸다는 점, 그리하여 잡지의 역할이 담론 생산이 아닌 트렌드를 점검하고 또 발빠르게 쫓는 것으로 변모한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은 강조해둘 필요가 있겠다. ‘작품’과 ‘상품’의 거리가 지워진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별’을 찾지 않고 그저 별점 평가를 참조해서 상품을 구매할 뿐이다.

 

자못 냉소적으로 ‘별점 평가’에 관해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별점 평가가 도입되지 않은 문학 작품에서 ‘별’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 이 작품 읽어봤어?’라는 일상어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라는 점에서 문학이 상품의 세계에서 조금 비켜서 있다고 한들 그렇게 비켜선 자리가 외려 독립이나 자립이 아닌 고립에 가까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만이 대안이다’라고 중뿔나게 외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 말을 들어줄 이도 없다. 자본제적 체제를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희망(‘별’)을 문학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고민과 유보만이 있을 뿐이다. ‘초조해 하는 것은 죄’라고 했던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저 고민과 유보의 시간이야말로 자본제적 시간의 문법에 다른 파선을 그을 수 있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고, 의심 없이 말할 자신이 내겐 없다. 분명한 것은 문학 작품이 우리의 삶과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재치를 부려 쓴 스무 자정도의 코멘트와 별점으로 요약되는 별점 평가는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은 작품의 고유성이라는 영역을 훼손 혹은 탈신화화 했지만(작품과 작품의 차이는 고작 별 네 개와 다섯 개 사이의 거리로 환원된다) 바로 그 별점이 다양한 대중문화를 일상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만큼은 새삼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문학작품을 별점으로 평가하는 것을 문학이라는 제도가 기왕에 쟁취하고 있던 ‘품격’을 폄훼하는 것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외려 문학이 더 이상 우리들의 삶과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될 필요가 있다. 문학작품의 별점화가 초래할 여러 문제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 방식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문학을 일상의 영역으로 내려앉힐 수 있는 계기나 방법을 기대하거나 고민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중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저 나름의 원칙으로 별점을 부여하는 것이 순환을 가능케 하는 한 축으로 기능한다면 별점평가가 문학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방점은 원활한 순환(유통)이 아닌 보다 건강한 생태 환경에 찍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장씩 발표되는 국내 앨범을 데일리 리뷰의 형태로 하루도 빠짐없이 업데이트 하는 음악웹진 <100 beat>(http://100beat.com)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절을 단위로 순환하는 문학의 느리고 긴 호흡 사이에 더 많은 작품을 다양한 관점으로 읽고 평가함으로써 접속할 수 있는 면의 다양화를 꾀하는 것으로써의 별점평가를 상상하는 것은 마냥 불손한 것일까? 몇몇 대형 출판사에서 ‘웹진’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바탕으로 문학의 유통 구조를 변모할 수 있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별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다. 문학 웹진은 또 다른 지면(紙面)일뿐 미래의 독자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지면(地面)은 아닌듯 하다. 저 한정되어 있는 지면에 위태롭게 솟아 있는 문학성(性/城)은 홀로 완고하다. 성문은 단 한번도 밖에서 열린 적이 없고 오직 성안에서만 열어주지 않았던가. 성문의 개폐 방식을 바꾸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안팎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들을 성벽 곳곳에 달아 성을 안팎이 만날 수 있는 접속면으로 변주해야 한다. 이는 문학이라는 제도의 확장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학적인 것’이 일상으로 흘러들고 일상이 문학으로 스미는 순환에 대해, 또 다른 문학적 생태 환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시(적인 것)와 소설(적인 것)을 쓰며 일상적으로 비평(적인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문학적 생태계말이다.

 

문학 작품을 별점 평가와 나란히 놓아두니 저 완고한 문학성(城)이 도드라진다. 매계절 두툼한 볼륨을 자랑하는 문예지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듯보이지만 그러한 과잉은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향락(사사키 아타루, 『잘라리, 기도하는 그 손을』)에 다름 아니다. 누구도 문학잡지를 통해 세계를 인지하거나 접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작품이 생산되지 않는 것을 작가들의 역량 문제나 문학의 지위 하락에서만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만남의 방식이다. 오직 연결과 접속을 통해서만 새로운 지면(地面)이 마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을 주어가 아닌 접속사로 재발명 하자는 요청(임태훈, 『우애의 미디올로지』)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남의 방식을 (재)발명 해야 한다는 제안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새로움’을 외치는 자본의 강령 아래에서 이종교배를 통해 생산되는 수많은 상품들과 달리 문학은 기어코 다른 길을 갈 것이라 마냥 낙관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부사적인 것으로서의 문학은 어떤가. 하나의 문장에서 결정적인 성분이 아닐뿐더러 없어도 무방하지만 있음으로써 얻는 소득과 보람에서 존재론적, 공동체적, 비평적인 징후를 포착한 이는 철학자 김영민이었다. 그는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는 정신문화적 ‘경부고속도로’의 바깥에서 이 어긋남을 어긋냄으로 되받아치는 것을 일러‘부사적’이라고 하며, 그 같은 움직임, 생활양식, 그리고 의욕을 동무라고”(『봄날은 간다) 했다. 체계나 제도에 접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그러한 일관된 수행을 통해 오히려 체계와 제도에 틈을 냄으로써 “그 스스로를 오히려 숨기는 편이면서도 기꺼이 이웃을 도와 그 전체의 행로를 바꾸는 변침(變針)의 노동을 하는 번득임”(『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나는 이러한 부사적인 존재론과 관계론에서 문학의 미래를 본다. 문장이라는 체계로부터 독립해 있으면서도 일거에 그 문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문학. 체계에 포섭되지 않고 외려 메타적 연계를 유지함으로써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으면서(김영민) 전체를 뒤흔드는 힘을 내장한 문학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