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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4

‘둥근' 말의 역사 ‘이곳이 불타고 있어요’ 분명 ‘그곳’은 불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자신이 자신을 태워 자꾸만 위로 ‘비상’하려는 불꽃이 있는가 하면 활활 타오르지는 않지만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장작더미 아래의 ‘남은 불씨’로 내내 타는 불도 있었다. 불과 불이 서로 엉겨 붙어 이내 꺼져버리기도 했고 불을 끄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함께 타버리기도 했다. 때론 함께 타올랐고 때론 홀로 타들어갔다. 말이 있었고 쉼없이 그 말들을 주고 받는 응(應)하기가 행해졌으므로 그곳에서는 ‘먼지조차 타서 불길이 되곤’ 했다. 타오르는 말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지만 그 말이 언제라도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灰)가 남았(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재 위로 다시 불을 찾기 위해 들어선 장작들.. 2012. 10. 18.
아직 정치가 아닌, 구조적인 쾌락 : 영화 <광해> 단상 2012 / 9 / 16 영화(추창민, 2012)를 보면서 도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왕이 된 광대를 보면서 ‘안철수’를 떠올리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와 ‘안철수’를 연결시키는 것은 통찰의 성과라기보다 체계화되어 있는 구조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다문화’나 ‘관용’이라는 용어만큼이나 오염된지 오래이고 이는 중도 좌파 따위의 리버럴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진보’와 ‘좌파’를 독과점하고 있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 영화 를 보며 ‘광대’가 행하는 ‘정치’에 감동한다는 것은 이명박 시대에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문재인에게서 다시 희망을 발견함으로써 이명박에 열광했던 과거를 은폐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아니 차라리 이명박과 노무현.. 2012. 10. 5.
메모와 상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메모'에 열중한다. 그만큼 소득이 없는 상념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메모는 언제 글이 되는가? 김영민이나 벤야민은 많은 메모를 남겼지만(남기고 있지만) 우리는 그 메모들을 '글'로 읽고 있다. 나는 무엇을 계획하고, 아니 무엇을 꿈꾸며 메모에 열중하는가? 상념이 많다는 것은 열중하고 있는 메모가 일상을 부지하기 위한 안간힘이거나 일상을 정당화하는 허영일 수 있음을 넌지시 가리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깨어 있고 싶다. 좀 더 '옮아가고' 싶다. 한밤 중에 남긴 메모 한 자락 :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 _아이작 디네센(한나 아렌트, 5장 中) 위의 한 문장은 '문학'이 품고 있는 규정할 수 없는 힘.. 2012. 9. 18.
건네받은 (말)원고 뭉치 근자에 더욱 활발히 회자되고 있는 벤야민의 (1940)는 그가 아득한 국경 앞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만난 아렌트와 하인리히 부부에게 맡긴 원고 뭉치였다. 가까스로 비자를 구한 이 부부는 리스본에서 체류한 3개월동안 벤야민이 건네준 역사 테제들에 관해 열렬하게 토론했다. 벤야민은 자살했지만 그의 원고 뭉치는 남았다. 살아남은 아렌트는 그에게 맡겨진 원고를 읽고 토론했으며 그것에 대해 다시 썼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그 생(生)과 사(死)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한낱 우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맡겨진 원고 뭉치는 남겨진 아렌트에 의해 ‘말 뭉치’가 되어 살아남은 이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벤야민의 글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말’과 ‘글’에서, ‘생활양식’과 ‘희망’에서 발견할.. 2012.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