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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메모와 상념

by 종업원 2012. 9. 18.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메모'에 열중한다. 그만큼 소득이 없는 상념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메모는 언제 글이 되는가? 김영민이나 벤야민은 많은 메모를 남겼지만(남기고 있지만) 우리는 그 메모들을 '글'로 읽고 있다. 나는 무엇을 계획하고, 아니 무엇을 꿈꾸며 메모에 열중하는가? 상념이 많다는 것은 열중하고 있는 메모가 일상을 부지하기 위한 안간힘이거나 일상을 정당화하는 허영일 수 있음을 넌지시 가리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깨어 있고 싶다. 좀 더 '옮아가고' 싶다. 


한밤 중에 남긴 메모 한 자락 :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

_아이작 디네센(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5장 中)

 위의 한 문장은 '문학'이 품고 있는 규정할 수 없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 '의미'를 품고 있는 모든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나는 이 문장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이작 디네센의 저 문장의 핵심은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면 해소할 수 있고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다'고 표현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문학은 슬픔을 비롯한 세계 속에 버려진 인간이 대면 해야만 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전유하는 오래된 양식일 것이다. 문학을 통해 슬픔은 존재를 희미하게 하거나 소멸시키는 폭력이 아닌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바로 세계의 불가항력적인 힘과의 대면이 존재를 미학적으로 갱신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픔을 이야기화 한다면 그것을 '참을 수 있다'고 한 구절 속에 내장되어 있는 의미일 게다. 문학이란 차라리 세계에 버려진 존재가 존재의 터로서의 '장소'를 구축하기 위한 쟁투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그것을 문학의 공간이라 부르고 싶다.


2012/9/25 덧붙이는 메모


<<인간의 조건>> 5장의 제사를 읽고 남긴 위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고, 추가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슬픔을 말로 옮겨 이야기를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녀는 슬픔에 빠진 이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위와 말을 통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시작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거나 연출자일 수 없다”(245)고 한 아렌트의 말처럼 슬픔을 말로 옮겨 이야기화 하는 것은 ‘남겨진 이’의 몫이다. 말과 행위의 결과물인 이야기들은 주체를 드러내지만 이 주체는 저자나 연출자가 아니며 , 이야기를 시작한 누군가는 이야기의 주체일 수는 있으나 이야기의 저자일 수는 없다(245)고 한 것 또한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 문장을 읽고 직감적으로 간취한 ‘아름다움’은 ‘문학적 수사’를 출처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존재함’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 곧 폴리스일 게다. 



"폴리스-페리클레스 추도사의 유명한 말을 신뢰한다면-는 모든 바다와 땅을 자신들을 자신들의 모험의 장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무런 증언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보장해주며, 따라서 그들을 칭찬할 줄 아는 호머나 그밖의 사람들이 필요없음을 보증해준다. 행위하는 자들은 타인(시인)의 도움없이도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의 영원한 기념비를 세울 수 있으며 현재나 미래에 찬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폴리스의 형식에서 함께 하는 인간의 삶(공동존재)은 가장 무상한 인간활동인 행위와 말 그리고 가장 덧없는 인위적 '생산물'인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준다." (259~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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