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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떨림과 견딤

by 종업원 2011. 7. 11.


1.
긴 시간 비가 왔고, 나는 내내 빗소리를 들었다.* 구경하고, 듣기만 했다. 운동화는 젖지 않았다. 열어둔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어와 재본한 책들이 흠뻑젖어버렸다. 그쪽에 머리를 놓아두고 잤던 나 역시 젖었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깨지 못/않고 내내 잠만 잤다. 연구실에 습기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조미김을 먹으면서 알았다. 밥을 먹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방금 뜯은 김이 금새 눅어져버렸다. 내게 연구실이 덥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에어콘을 한번도 틀지 못한 이번 여름동안 덥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그게 내 문제다. 김이 놀라울정도로 빨리 눅어버리는 것을 보고 연구실에 습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



2.
무더위와 무관하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시절이다. 내게 쏟아지는 대개의 시간을 적응하기 위해 투기하고 있지만 정각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견딤'은 '적응'으로 가기 위한 유효한 한 갈래의 길처럼 보이지만 '견딤'은 그저 '견딤'에 불과하다. '적응'이 '축적'과 조응한다면 '견딤'은 '낭비'와 조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계를 견디고, 시간을 견디고, 감정을 견딘다. 빗소리를 견디고, 활자들을 견디고, 믹스 커피를 견딘다(나는 내 견딤의 대상을 이 정도로 밖에 나열하지 못한다). 



3.
'떨림'도 견뎌야 한다. 무엇보다 떨림은 적응하기 힘든 것. 그러나 떨림만큼은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것. 그것은 온전히 내 몫인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떨림을 견뎌내는 그 시간 속에서 한 시절을 온전히 보냈을 때만 써낼 수 있는 좋은 글 한편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4.
리얼리티나 서바이벌 프로에 관한 글을 몇편 쓴적이 있어 공중파에서 방영중인 '나가수'류의 프로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챙겨보고 있는데, 케이블쪽 프로들은 너무 많아서 아얘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고 '코리아 갓 탤런트'나 '기적의 오디션' 따위의 프로들은 보자마자 진절머리가 나서 그만두었지만 KBS에서 방영 중인 'TOP밴드'(이 프로의 방영 시간은 특이하게도 토요일 밤 11시다)에는 500원의 제휴결제라는 초유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챙겨보고 있다(하루를 참지 못하고 현금을 지불하고 파일을 다운 받는 것은 록밴드 서바이벌이라는 흥미로운 소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딘가의 기댈 곳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요 근래의 둘 곳없는 내 정서 탓이 클 게다). 이 프로에 관한 관련 글 한편을 써보고 싶은데, 늘 그렇듯이 적당한 청탁이 들어오기 전에는 시작하지 못할 듯하다(써야할 글들이 너무 많고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잃어간다. 그 자신감의 상실이 그저 정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데 치루는 물리적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버린 것에 대한 구체적인 우려라는 점이 더욱 문제적인지도 모르겠다). 



5.
MBC에서 방영중인 <나는 가수다>를 보다 문득 든 생각 한 자락:

매주 자신의 한계에 도전을 하는 저 특급 가수들의 시도들이 마치 새로운 체위를 개발하려 무던히도 애쓰는(더 크게, 더 빨리, 더 강하게!) AV배우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 그것은 적응일까, 견딤일까, 아니면 견딤을 가장한 떨림일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바이벌'이란 실은 적응과 견딤을 적절히 배합하고 떨림을 잘 활용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중간한 상태(suspens)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 김일두의 <SUSPENS>앨범을 반복해서 들었다. 빗소리와도 잘 어울렸고, 견딤과도 잘 어울렸으며, 때때로 떨림과도 어울리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천재' 뮤지션 김일두 씨의 2006년 공연모습(2006년 부산 비엔날레 블로그http://busan2006.egloos.com에서 가져왔다. 장소는 온천천인 듯 하다. 김일두 씨가 저 공연에서 신고 있는 구두를 며칠 전 만났을 때도 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