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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글9

4월 일기 2023. 4. 17 망한 사람으로부터 배움_비온후책방 강연을 마치고 최종규 작가님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늘 그렇듯 경이로운 이야기가 많았지만 칫솔질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이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이틀날부터 자연스레 최종규 작가님이 알려준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며 최종규 작가님을 생각했다. 작가님 치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칫솔질 이야기에 더 믿음이 갔다. 그저 망하기만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드물게, 망하면서 배울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망한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어떤 이는 망하면서 알게 된 것을 슬기롭게 건넨다. 망한 세상으로부터 배울 게 있고 망한 생활 속에서도 캐낼 것이 있다. 슬기롭게 망할 수야 없겠지만 망한 뒤에 한줌 정도에.. 2023. 4. 27.
꿈이라는 비평 2023. 1. 22 1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그이의 꿈 속에서 노닐다 나온 뒤 나는 사람들을 모아 꿈 속에서 내가 본 것들을 이야기 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 말한 것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것이었다. 꿈을 꿨다기보단 꿈이 나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꿈이 내게 말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 꾸었던 꿈을 생각하며 급히 적었다. 어쩌면 비평은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은 이가 쓰는 글이라고. 누군가의 꿈에 (초대 받아)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 내가 꾸는 꿈이라 생각되지만 누군가의 꿈에서만 꿀 수 있는 꿈이라는 게 있다. 나는 그 꿈 속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마음껏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꿈은 내가 꾸는 꿈이 아니다. .. 2023. 1. 29.
도둑 러닝(2)_달리기 살림 2021. 10. 27 언제나 그렇듯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난한 프리랜서들의 공통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자기심문적인 질문은 자주 예고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곤 한다. 한창 러닝에 빠져 있을 때 ‘왜 달리는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뾰족한 답을 구하진 못했다. 다만 이 메타화의 과정이 피로하지 않았고 다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기는 맘으로 이 질문을 품고 지낼 수 있었는데,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10월의 어느 날, 벌판을 달리던 수만년전의 인류가 떠올랐다. 빠르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던 인류의 뜀박질에 대해서 말이다. 수년전 1일 1식을 하는 동안 허기를 넘어선 ‘텅 빈 상태’가 잠.. 2022. 10. 27.
도둑 러닝(1)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 2022. 10. 27.
용감한 연약함 어디서든 아기를 만나면 저절로 함박 미소를 띠게 된다. '너는 언제 저런 아이 낳고 살래'라는 생애사 평균 시간표가 한참 늦은 것에 대한 타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무조건적인 이 반응이 다행스럽다. 홀로 길을 걷다 길고양이를 만나면 저절로 고양이 소리를 내게 된다. 야옹야옹. 말하기를 중단하고 다만 가엽고 반가운 마음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한번도 길고양이가 나를 향해 다가온 적 없지만 내가 흉내 낸 고양이 울음소리가 무척 다행스럽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되는 순간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어리석고 유치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무방비 상태는 도리없이 반복된다. 생활 속에서 그 반복만큼 다행스러운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을 할 때도 나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바보.. 2019. 2. 24.
삶을 가꾸는 생활글 쓰기 강좌(12강) 9월부터 '생활글 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대안적인 인문학이나 연구자 재생산 기반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엔 늘 대중 강좌 기획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었는데, 돌이켜보니 대학 수업 외에 정작 대중 강좌를 진행한 이력이 그리 많지 않다. 친구인 '히요'가 제안해주어 아직은 조금 불편한 에서 12강의 강좌를 열게 되었다. 모임 구성원은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16명 가량 모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의 분포도가 가장 높은데 대부분 직장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중앙동으로 오는 듯하다. 강좌명 중에 '삶을 가꾸는'이라는 표현은 이오덕 선생의 글귀에서 빌려온 것이고 '생활글 쓰기'는 70-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의 생활글 역사와 이어져 있다. 연초부터 진행해왔던 '한국 노동자 생활글.. 2017. 10. 27.
<생활-글-쓰기 모임> 2회 2015. 7. 7 design by yang 생활-외국어-번역 하기 1 작년 7월, 동료들과 팀을 이루어 독일 베를린에서 한 달 간 체류하며 공동 작업을 했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이었지만 설렘의 시간은 잠깐이었고 서른이 훌쩍 넘은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이국땅에서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일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우리 모두는 급속도로 지쳐갔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황판단능력과 직관능력이 간난 아이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몸으로 체험했던 힘든 시간 속에서 적어도 서로에게만큼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홀로 애썼던 시간을 기억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았기에 우리는 .. 2015. 7. 10.
<생활-글-쓰기 모임> 1회 2015. 6. 23 design by yks 벼랑 끝의 생명을 살리는 일 오래된 의 낡고 벌어진 틈 사이에 길고양이 가족이 잠들어 있다. 다가가도 깨지 않고 이미 깨어 있는 고양조차 도망가지 않는 것은 미숙하고 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이 지금 잠들어 있는 고양이 가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하부에 저런 알 수 없는 틈이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도시 하층민들과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 안에도 어쩌면 저런 틈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집이 없는 모든 것들이 잠깐이라도 쉴 수 있었던 곳은 ‘틈’이지 않았던가. 납득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 속에도 ‘살림’이 꾸려진다. 납득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누군가는 살아가고 그 살림이 또 누군가를 살린다.. 2015. 6. 22.
"언니야" 2015. 5. 31 "언니야. 나 월급 만 이천 칠백 이십원 탔어. 홍자네 4천원은 내가 인옥이네집에 가는 길에 가져다 줄게. 남은 돈 4천원은 여기 있어. 책가방 천원, 신발 5백원, 노트 백원, 양말 2백 50원, 인형 2백원, 외상값 34원, 봉투 50원, 내가 쓴 것은 이상이야. 인옥이네서 자고 내일 올게. 월요일부터 출근하래."―석정남, 1976년 3월 5일 일기, 「불타는 눈물」, 《대화》 1976. 10월. 석정남은 불꺼진 방에 들어서며 자신의 동생 이름을 부른다. '정숙아, 정숙아!' 방에 들어와 불을 켜보니 정숙이의 메모가 있다. 어디 갈 때는 반드시 메모를 해놓고 가라고 언니의 한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동생 정숙이 언니에게 남긴 메모를 석정남은 자신의 일기장에 다시 옮겨 적었다. .. 2015.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