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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25

박민정의 두 번째 소설집(계속) 너는 듣거나 보지 못했겠지만, 선생은 종종 혼잣말을 했고 즐거운 상황들을 강박적으로 상상하다 히죽 웃곤 했다. 아카데미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면 선생은 고삐 풀린 것처럼 행동했다. 집 앞 카페에 앉아 공부를 할 때 증상은 심해졌다.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후비는가 하면, 아이처럼 손가락을 빨아대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선생은 어느 정도 자기 행동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틱 비슷한 증상이 시작됐다는 것도 물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애써 자기 행동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대학원생으로서, 시간강사로서, 입시 컨설턴트로서의 자신과 그 외의 자신을 구분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남들이 보지.. 2018. 12. 16.
아마존의 스핑크스 2018. 5. 22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물었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험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우리 사냥 동료들이 그랬듯이 어떻게 해야 올바로 응답하는 것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스핑크스가 (약간이나마)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위치에서 물었던 이 수수께끼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했다. 이것은 스핑크스의 질문에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응답이다. 그 비인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선을 맞추고 응답해야 하는 '인간적이지 않은' 스핑크스는 인간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의문시하도록 만든다. 나아가 스핑크스의 질문은 우리의 답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낸다. 처음에는 네 발, 다.. 2018. 5. 22.
아무도 알지 못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2018. 1. 26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적당히 집어 들고 언제까지나 그 돌을 지그시 바라보는 버릇이었다. 내 정신을 쏙 빼놓은 것은 바로 무수한 돌멩이 중 하나일 뿐이었던 그것이 '이 돌멩이'가 되는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난 한 번도 돌멩이에 감정이입을 한 적은 없었다. 이름을 지어 의인화하거나 자신의 고독을 투영하거나 돌멩이와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상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근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무작위로 하나를 골라 손바닥에 올려놓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의식을 집중시켜 응시하고 있으면, 점점 별다른 특징도 없는 돌멩이의 형태, 색깔, 무늬, 표면의 모양, 흠집 등이 한껏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다른 어떤 돌멩.. 2018. 1. 26.
임솔아, 빨간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먹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와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 사이를 헤맬 것이다. * 이곳으로 가면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인간이라는 말을 .. 2017. 10. 3.
선물의 자리 : 부음(訃音)이 용서로 부화할 때 2017. 8. 28 계란 한 판 두부 한 모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계란 한 판과 두부 한 모를 받았다 아직 친구라고 할 수 없는 그는 처음 우리 집에 왔고 그를 만난 것도 처음이다 그가 있을 때 골목으로 두부 장수가 종을 흔들며 지나갔다 계란을 오래 두고 바라봤다 밖에 나갈 때나 밤늦게 돌아올 때나 마당에 우두커니 서게 되는 나의 마음이 슬픈 것에 매번 놀라며 그러다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그래서 한 번에 용서할 수 있었던 친구 살아 있었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그 옛날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한꺼번에 부화된 어두운 시간들이 ⏤조은, 「계란 한 판 두부 한 모」,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사, 2003. 처음 만나는 사람이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집으로 방문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 2017. 9. 3.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 2016. 8. 15 “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우리가 패배했음을, 끔찍한 상황에 처했거나, 우습게 되어 버렸거나, 길을 잃었음을 인정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또 가끔은 구급차나 하늘에서 떨어진 보급품처럼 변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적지 않은 이야기가 침몰하는 배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주위에 온통 구명보트가 떠 있는 상황에서도.”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김현우 옮김, 반비, 2016), 14쪽 쓴다는 것의 희망에 관해 내밀하고도 방대한 사례들을 사려깊은 손놀림으로 정성을 다해 뜨개질한 리베카 솔닛의 역작, 『멀고도 가까운』에서 나를 사로잡은 대목은 이야기의 절망에 관한 것이었다. ‘적지 않은 이야기가 침몰하는 배를 닮았다’는 문장을 옮겨두고.. 2016. 8. 15.
연구자와 전령 2016. 4. 6 "코뮌 간 접촉은 '필요하다'기보다는 '원하게 된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코뮌도 코뮌적인 운동도 생로병사를 겪기 때문이다. 병이 든 순간에 다른 코뮌과 접촉하는 것은 '이쪽'의 무거움을 덜어 주고 숨 쉴 구멍을 마련해준다. 또한 '저쪽'을 통해 '이쪽'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하기도 하며 고립감에서 벗어날 출구가 되기도 한다." ―신지영, 「프롤로그: '이후'와 '계속' 사이에서」, 『마이너리티 코뮌』, 갈무리, 2016, 16~17쪽. "소문의 확산은 정치적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비겁함을 극복하고 이야기를 증언하고 퍼뜨려 갈 수 있다면 어떨까? 심화하고 있는 전 세계의 인종주의와 파시즘화 속에서 나는, 여러 가지 갈래로 겹쳐지는 길에 대한 경험을 .. 2016. 4. 6.
같이 있음의 세계-윤이형, 「대니」 2016. 3. 16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주인 없는 집 담장 안에 소담스럽게 핀 능소화(능소화가 뭐죠? 잠깐만요, 이제 알겠어요.) 꽃집 진열대에 걸린 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견디는 벌레잡이통풀의 벌레 주머니(왜 호기심 어린 시선이에요? 왜 견디죠?). 집 나간 고양이를 걱정하는 옆 건물 노파의 울음소리(어떻게 생긴 고양이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목소리(찾았나요?). 잠든 아이의 이마에 살짝 배어난 땀냄새(그건 나도 좋아해요). 그런 아이를 보고 웃는 마음 착한 청년의 긴 손가락.” -윤이형, 「대니」,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37쪽. 한편의 소설을 읽으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두근거림’이다. 가끔 그것은 ‘초조함’의 모습을 띠고.. 2016. 3. 16.
건네 받는 것의 힘 2016. 3. 5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꿇고 간청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측은히 여겨 손을 펴서 만져 주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곧 나병이 물러가고 깨끗해졌다. —「마르코 복음서」 1:40-42. 당시의 나병환자는 지금의 한센병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 환자까지를 두루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사람들이 다가오면 “불결, 불결”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2000) . 김규항은 『예수전』(돌베개, 2009)에서 ‘측은히 여기시고’를 중심에 두고 예수의 면모와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결을 살피고 있다. ‘측은히.. 2016. 3. 6.
의도 없이, 욕심 없이 2016. 2. 24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시오.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며 헐뜯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오.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는 다른편 뺨마저 내밀고,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마시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한테서는 되찾으려 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똑같이 사람들에게 해 주시오.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준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그만큼은 합니다.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죄인도 고스란히 되받을 성싶으면 자기네끼리 꾸어줍니다. 원수를 사랑하.. 2016.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