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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그 웃음 소리

by 종업원 2013. 9. 10.

2013. 9. 9


지난 날 하루에 두 탕, 세 탕까지 일을 하셨던 내 어머니는 자투리 시간엔 동네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셨다. 어떤 날은 잃으시고 또 어떤 날은 따시기도 하면서 거의 매일 고스톱을 치셨는데, 훗날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어떤 날은 당일 일당을 모두 잃은 날도 있었다고 하길래 아깝지 않았냐고 물으니 내겐 백원짜리 하나도 허투루 주지 않으신 분이 아무렇지 않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뭘 그러냐'며 무척이나 쿨하게 말씀 하시지 않은가. 그러니까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 배급소에 나가 신문 광고지를 넣고 6시에 돌아와 도시락 4개를 싸고 아침상을 차린 뒤 잠깐 주무신 후 11시에 식당으로 나가 3시까지 식당일을 하시고 다른 일이 없으면 저녁이 늦도록 고스톱을 치시는 것이다. 우리 집이 자주 '무대'가 되곤 했는데, 고스톱을 치시는 소리가 어찌나 흥겹고 신나는지 잔칫날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물론 사소한 시비로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그런 건 꼭 100원, 200원의 문제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던 쾌활하고 호탕한 내 어머니의 웃음소리에 대한 기억은 한창 고스톱을 치시던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열심히 일하고 또 그만큼 열심히 고스톱을 치던 시절에 내 어머니는 청소를 할 때면 자주 콧노래를 부르고 때론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다.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걸레질을 하시던 내 어머니가 신기하게 여겨져 '청소가 재밌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다. "하나 하나 지워지고 깨끗해지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아냐?" 다른 세계였다.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걸레질을 하는 세계는, 하루 두 탕, 세 탕을 뛰고 황급히 달려가 고스톱을 치는 세계는, 내가 영영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기분이 좋을 때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노래는 부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성실히 벌어 알뜰하게 사는 재미를 아는 사람, 그런 세계가 없어진 것이다. 몇번 인용한 적이 있지만 버스나 지하철에 무리지어 탄 50대 중년 여성들의 호쾌하고 건강한 웃음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능력)으로 성실히 일해 집을 짓고 그 아래에서 자식들을 키운 이들의 웃음 소리는 이제 없다. 

그 보다 더 오래 전 내 아버지가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가 있을 때, 파출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내 어머니가 10시 즈음 화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만 전화 통화를 하는 목소리에서 인근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어머니를 기다리면 언제나 1시가 넘지 않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시는 거였다(그때 내 누이는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쿨쿨 잤다). 때로는 자는 척을 했고 또 때로는 이제 깬척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잠들기 전에 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척 안심이 되고 기쁘기까지 했다. 이 또한 훗날 여쭈어보니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며 흠칫 놀라시는 거였다. 중동에 가 있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거나 계돈을 날려먹는 서사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지만 춤을 추되 그 이상의 일은 일절 없었다고 덤덤하게 말하셨다. 내 어머니의 키는 140cm가 조금 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기도 하셔서(그러나 무척 열정적이고 뜨거우신 분이라 어마어마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별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의심하면 내가 뭘 어쩌겠나?). 명절이나 좋은 날, 친지나 아버지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시다 블루스나 지루박을 '착, 착' 추시기도 했는데, 그 몸사위가 무척 날렵해 지금도 그 모습이 선연하게 기억 난다. 

퇴행성 디스크라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으시고 10년이 지난 지금 내 어머니는 아기처럼 아장 아장 걸으신다. 대학원 시절 늘 막차를 타고 퇴근해 30분간 '헤비메탈+파워워킹'으로 산복도로를 힘차게 올라오면 내 어머니는 언제나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시곤 오늘 있었던 일들(대개는 화가 나는 일들이었다)을 내게 하나 둘 늘어놓으셨다. 평생을 임금노동자로 살아오신 분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형편이 폐경과 겹쳐 우울증을 앓고 계셨는데, 군대 가기 전 독립 영화를 찍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자주 집에 있을 때 시작된 내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거대한 우주를 만난 이후 나는 줄곳 어머니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심봉사마냥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듬거리며 만졌던 그 질감을 알고 있던 터라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어지던 그 말들을 조금의 어려움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맞장구를 쳐주거나 되물어보거나 가끔 개입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었다. 물론 대개는 내 침대에 누워 계시는 내 어머니의 발을 주무르면서 말이다. 한날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대화가 계속 되었던 적도 있다. 나는 아직도 본가에 가면 내 어머니가 내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다. 이전 만큼의 집중도는 아니지만 밥을 먹으며(본가에서 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집밥을 먹는 것이다. 밥을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TV를 보며 내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맞장구도 치고 되묻기도 하고 가끔 훈수를 두기도 하는 것이다. 효자 경력은 단박에 무너지지 않는다!

노래와 춤이 없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노래는 노래방에서, 춤은 클럽에서만 부르고 춘다. 기분이 좋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싶다. 그래야 한다. 일상 속에서 춤과 노래가 사라졌다. 그것은 내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시기과 겹쳐 있는 듯하다. 생애사적 주기의 문제도 있겠지만 춤과 노래, 그리고 건강한 노동 이후 떳떳하게 웃는 웃음소리는 IMF 이후(내 어머니가 퇴행성 디시크 진단을 받고 내 아버지가 한보철강-그 유명한 한보-천안 공장에서 정리 해고를 당한 게 2000년이다) 거의 사라진 듯하다.오늘 한 후배와 이야기를 하다 <문학의 곳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시절 일상 속에서 가능했던 '그 노래와 춤'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작품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더라도, 그 작가에 대해 모르더라도, 단 한 문장이나 하나의 단어라도 발견하고 캐내어 자신의 일상 속에서 부려 써보는 것. '단 하나의 문장도 홀로 쓰는 게 아니므로' 그 문장을 캐내고 가질 수 있는 이 또한 한 명이 아니다. '문학'이 여유가 되고 관심이 있는 이들만이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쓸 수 있는 공공재임을 인지하고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는 방식을 함께 연습하고 때론 실험하고 실천해나가고 싶다. 내 어머니의 노래와 춤은 무척이나 형편없는 것이었지만 그 호쾌하고 건강한 웃음 소리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도 흉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생활예술모임 곳간에서진행하는 <문학의 곳간>을 통해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되찾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웃음 소리와 같은 것이다. 

언젠가 내 어머니께 소원이 뭐냐고 여쭈어보니 '막 출발하는 버스를 달려가 잡아 타는 것'과 '뾰족 구두를 신고 블루스는 춰보는 것'이라 말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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